▲ 박제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복수노조 허용과 함께 교섭구조를 새롭게 짜기 위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이 논쟁을 좌우했던 기준은 교섭권의 실질적 보장이 아니라 교섭 비용의 억제였다. 어떤 제도가 단체교섭권을 보장하는 데 더 적합한지가 아니라, 어떤 제도가 교섭 비용을 줄이는 데 더 적합한지가 기준이었다. 이 대차대조표에서 노동자의 교섭권은 언제나 비용의 자리에 기입된다. 그러면 교섭권을 약화시킬수록 비용이 적은 제도, 즉 효율성이 높은 제도가 된다. 노동자 고용을 비용의 자리에 기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용을 보장하는 것은 비용을 증가시키는 것이고, 해고의 유연화는 비용을 낮추는 효율적인 제도가 된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법경제학적인 접근법이다.

법경제학은 로널드 코스라는 경제학자의 이론에서 시작한다. 코스는 1960년에 미국 법경제학회지에 ‘사회적 비용의 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코스는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거래비용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가격시스템(시장)을 통해서 언제나 경제적 효율성이 달성되는 방향으로 권리가 조정된다. 둘째, 거래비용이 존재하는 실제의 경우에는 권리가 어떻게 설정돼 있는가에 따라서 경제적 효율성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법·제도는 경제적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는 방식으로 권리를 설정해야 한다. 코스는 이렇게 말한다. “법원은 판결이 초래하는 경제적 효과를 고려해야 하고, 경제적 효과를 고려해 판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법경제학은 한국에서도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다. 한국법경제학회가 정기적으로 주최하는 “법원과의 법경제학 연구회” 세미나에 참석하는 어떤 법학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재판 과정에서 법의 해석과 적용이 문제되는 경우에도 법관은 경제적 효율을 고려해야 하고, 또 실제로도 고려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관점은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파업의 적법성을 부정했던 2003년 대법원 판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경영권과 노동권이 충돌하는 경우 대법원은 이렇게 판결한다. “기업 경제상의 창의와 투자 의욕을 훼손시키지 않고 오히려 이를 증진시키며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함을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업이 쇠퇴하고 투자가 줄어들면 근로의 기회가 감소되고 실업이 증가하는 반면, 기업이 잘 되고 새로운 투자가 일어나면 근로자의 지위도 향상되고 새로운 고용도 창출돼 결과적으로 기업과 근로자가 다 함께 승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경영권과 노동권을 모두 재산권으로 환원한다. 둘 다 재산권이기 때문에 맞비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경영권을 보호하는 것이 비용감소와 후생증가에 유리할까, 아니면 노동권을 보호하는 것이 유리할까? 그러면서 노동권을 제한하면 기업의 경영여건이 좋아져서 결국 노동자에게도 유리한 결과로 돌아온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즉 노동권을 보호하면 노동자의 후생만 증가하고 기업의 후생은 줄어들지만, 경영권을 보호하면 노사 모두의 후생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언제나 경영권 우선이다.

이 판결은 노동권이 재산권이 아니라 인격권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노동권이 재산권이라는 관점은 노동을 비용으로 처리하는 경제학의 시각에서만 그렇다. 헌법을 위시한 우리의 법질서는 노동권을 인격권으로 본다. 인격권과 재산권은 맞비교할 수 없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시장에서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 그것이 곧 인격이다. 가격을 매길 수 있는 모든 것, 그것은 인격이 없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가난과 유럽 선진국의 가난을 가난이라는 같은 단어로 통칭해 버리면 둘의 질적인 차이를 무시하게 된다. 재산권과 인격권을 권리로 통칭해 비교하면 둘의 질적인 차이를 무시하게 된다.

법경제학의 관점에서 볼 때, 계약을 이행할 때 발생하는 비용보다 계약을 위반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편익이 더 크면,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법경제학에서는 이것을 “효율적 계약 파기 이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결국 강자의 자의적 의사에 따른 지배로 귀결된다. 계약의 일방 당사자가 비용-편익 계산을 통해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을 때, 다른 당사자는 그 선택의 부정적 효과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약속의 이행을 보증하는 제3자 보증인이 사라진 곳에는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오래된 격언이 자리 잡지 못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평화도 없다. 라틴어로 약속과 평화는 어원이 같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jeseong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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