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LO 총회 전원위원회가 지난 13일 스위스 제네바 유엔유럽본부에서 ILO 100주년 선언문을 축조심사하고 있다.<김학태 기자>
한국 정부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노동기구(ILO) 100주년 총회에서 망신을 자초했다. 정부는 산업안전보건을 기본노동권에 포함하는 내용을 ILO 100주년 선언문에서 빼자고 주장했다가 철회했다. 한국이 세계 최고 산업재해 사망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데도 정부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산업안전보건은 기본권” 국제사회 추세인데

18일 ILO 총회 전원위원회 노동자그룹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ILO 100주년 선언문 채택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잇따라 수정안을 냈다. 전원위는 총회 마지막날인 21일 채택할 예정인 100주년 선언문을 축조심사하는 곳이다.

선언문 초안에는 “산업안전보건은 1998년 채택한 ‘일터에서의 기본 원칙과 권리에 관한 선언문’에 명시된 권리에 추가되는 일터에서의 기본원칙이며 권리”라는 문구가 있다.

ILO는 98년 선언에서 △결사의 자유 보장 △아동노동 금지 △강제노동 금지 △차별금지를 네 가지 원칙으로 제시하고 8개 협약을 모든 나라가 비준해야 하는 기본협약으로 선정했다. 네 가지 원칙에 더해 산업안전보건을 추가하자는 것이 선언문 초안 내용이다.

그런 가운데 한국 정부와 인도 정부가 전원위 회의 초반에 "산업안전보건에 관한 내용을 선언문에서 삭제하자"는 내용의 수정안을 냈다가 지난 17일 철회했다.

한국 정부는 이주노동자 권리와 관련해서는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전적으로 보장한다”는 문구에서 “전적(fully)”이라는 문구를 삭제하자는 수정안을 냈고, 18일 현재까지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ILO 100주년 선언문은 ILO가 올해 1월 발표한 일의 미래보고서 내용을 근거로 한다. 일의 미래보고서에는 △적정 생활급 보장 △최대 노동시간 제한 △산업안전 및 보건에 관한 조치를 보편적 노동권 보장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으로 명시하고 있다. 특히 “산업안전 및 보건이 노동자 기본권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적시돼 있다.

ILO가 올해 총회에서 채택하는 100주년 선언은 1944년 ‘국제노동기구의 목적에 관한 필라델피아 선언’에 필적할 내용이 담길 것으로 기대된다. ILO가 산업안전보건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상헌 ILO 고용정책국장은 지난 13일 제네바 ILO 본부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인으로서 산업안전보건 문제 얘기만 나오면 부끄러울 정도로 한국의 산재사망률이 너무 높다”며 “산업안전보건을 보편적 권리로 넣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인 만큼 한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이재갑 장관을 비롯한 고용노동부 관계자들은 지난 12일 ILO 총회에 함께한 국내 기자들에게 “한국 정부가 최근 산업안전보건법을 전부개정한 것에 대해 ILO 관계자들의 관심이 높다”고 강조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산업안전보건을 기본노동권에 포함하는 것에 반대한 것은 산재사망 감소나 노동기본권 보장에 대한 의지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다른 표현 고민하다 실무착오로 삭제 의견”

신인수 민주노총 법률원장은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CCMM빌딩에서 한국노동연구원이 주최한 ‘ILO 핵심협약 비준과 입법적 쟁점 토론회’에서 “한국 정부가 수정안을 낸 것은 국제망신이자 ILO 핵심협약 비준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주장했다.

강훈중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장은 “산재공화국 오명을 벗어나려는 노력은커녕 국제망신을 자초해도 유분수”라며 “제네바에서 기자들에게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을 자랑하더니 뒤에서 그런 꼼수를 부렸다”고 비판했다.

제네바 현지에 있는 노동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ILO 총회 전 핵심협약으로 4개 분야를 규정한 98년 선언과 이번에 채택될 100주년 선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불명확해서 기본원칙(fundamental principle)에서 fundamental을 다르게 표현할 수 없는지 고민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실무착오로 아예 삭제하자는 수정안을 낸 것을 알게 됐고 곧바로 철회하기로 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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