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수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삼성전자 LCD사업부(현 삼성디스플레이) 뇌종양 피해자 한혜경님이 지난 5월30일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업재해 인정 통지를 받았다. 2009년 최초로 산재를 신청해서 대법원까지 가서 패소했으나 지난해 재신청해서 10년 만에 인정받은 것이다.

한혜경님은 모듈과 인쇄회로기판(PCB)에 전자부품을 납땜하는 SMT공정에서 5년9개월간(1995년 11월~2001년 7월) 생산직 오퍼레이터로 근무하면서 납과 플럭스·유기용제 등에 노출됐다. 재직 중 건강이 나빠져서 퇴사했고, 퇴사 4년 뒤에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소뇌부에 발생한 뇌종양을 수술로 제거하긴 했지만 그 후유증으로 시각·보행·언어장애 1등급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2008년 가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 피해 사실을 제보하고 2009년 산재 신청을 했다.

한혜경님은 2009년 최초신청 불승인 이후 심사·재심사, 법원에서 1~3심, 그리고 재신청 이후 첫 번째 심의 과정(가부동수 보류결정)까지 모두 7번의 심의 과정에서 산재를 인정받지 못했다. ‘재신청을 통해 8번째 만에, 최초신청 후 10년 만에’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빼고라도 한혜경님의 산재 인정은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할 만하다.

우선 전자산업 같은 첨단산업 분야에서 발생하는 질병의 업무관련성 판단에 있어 기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 의학적 판단을 핵심 근거로 삼을 경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명확히 한 것이다. 사실 이는 최근 대법원 판례에서도 수차례 확인된 바 있다.

“전통적인 산업 분야에서는 산업재해 발생의 원인이 어느 정도 규명돼 있다. 그러나 첨단산업 분야에서는 작업현장에서 생길 수 있는 이른바 ‘직업병’에 대한 경험적·이론적 연구 결과가 없거나 상대적으로 부족한 경우가 많다. 첨단산업은 발전 속도가 매우 빨라 작업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이 빈번히 바뀌고 화학물질 그 자체나 작업방식이 영업비밀에 해당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경우 산업재해 존부와 발생 원인을 사후적으로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대법원 2017. 8. 29. 선고 2015두3867 판결)

이는 업무관련성을 뒷받침할 만한 연구 결과가 없거나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이를 업무관련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나아가 이후 그런 연구 결과가 쌓이거나 유사한 사례가 계속 확인된다면 이는 업무관련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므로 업무관련성에 대해 새로운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근로복지공단이 이를 인정하고 새롭게 판단한 것이다.

“최근의 뇌종양 판례 및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승인된 유사 질병 사례를 고려할 때 업무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어 신청 상병과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것이 심의회의에 참석한 위원들의 다수 의견이다.”(한혜경님의 업무상질병 판정서 중에서)

한혜경님의 산재 인정이 지닌 중요한 의미 중 또 하나는 대법원까지 가서 패소한 건인데도 재신청을 근로복지공단이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동안 재심사까지 불승인됐다가 재신청을 통해 산재 인정을 받은 사례는 다수 있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패소한 건에 대한 재신청을 받아들인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근로복지공단이 처음부터 이를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민주노총 법률원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에서 “원처분에 대한 법원 패소(불승인) 확정판결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근로복지공단이 원처분 직권취소를 하는 데 있어 아무런 제한이 존재하지 않는다” “헌법과 법령에서 정한 근로복지공단의 역할과 기능, 산재보험 제도의 목적과 기능 등을 고려할 때 원처분의 흠을 시정하는 것은 오히려 행정청의 의무에 해당한다”고 적극 주장했고 이를 근로복지공단이 수용한 것이다. 행정기관 입장에서 과거 자신의 처분이 잘못됐음을 인정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근로복지공단에 대한 국민 신뢰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의 이번 결정에 지지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이번 산재 인정은 한혜경님에게 크나큰 선물일 것이다. 한혜경님은 어머니 김시녀님과 함께 그 누구보다 오랜 기간 열정적으로 전자산업 직업병 문제를 제기한 분이다. 함께 시작한 많은 동료 노동자들이 산재를 인정받았고, 심지어 몇년 전부터는 같은 뇌종양으로 투병하던 노동자들이 산재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일찍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문제제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재 인정을 받지 못했던 한혜경님의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산재로 인정돼 무척 다행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한 또 다른 노동자들이 다수 존재할 것이다. 그들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산재 인정이 보다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

이런 역사적인 산재 인정은 한혜경님을 비롯한 수많은 전자산업 노동자들과 반올림을 비롯한 여러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 관련 전문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만큼이나마 정의로워지도록 애쓴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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