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레, <씨 뿌리는 사람>, 1850년, 캔버스에 유채, 미국 보스턴 미술박물관.

가파른 땅 위에서 한 청년이 힘차게, 그리고 빠른 발놀림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는 씨 뿌리는 농부다. 낡은 모자를 쓰고 붉은 윗옷에 푸른색 바지 작업복을 걸치고 밀짚 각반을 다리에 찬 채, 그는 걸어 다니며 오른손에 움켜쥔 씨앗들을 조금씩 흩뿌리고 있다. 날은 궂고 까마귀 떼들은 뒤에서 기껏 그가 뿌린 알곡을 먹으려 달려들고 있는 모습이지만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더 듬직해 보인다. 입을 조금 벌린 그의 얼굴 표정을 보면 청년의 거친 숨소리가 마치 우리 귓전에 들릴 듯하다.

▲ 이유리 <화가의 마지막 그림> 저자

이 작품은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1875)가 1850년에 그린 <씨 뿌리는 사람>. 한 해 전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시골 마을인 바르비종으로 이사한 밀레가 새 삶터에서 그린 야심작이었다. 그는 1850년 12월에서 1851년 1월에 열린 살롱전에 이 작품을 출품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그리려 한 건 노동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몸을 움직여 수고하도록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네 이마에 흐르는 땀의 대가로 살아야 한다’고 오래전에 <성경>에 쓰여 있듯이 말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을 인간의 운명입니다.”

'고귀한 노동'에서 혁명을 본 부르주아
반항의 씨앗 기대한 공화주의자


그러나 <씨 뿌리는 사람>이 살롱전에 전시되자 분위기는 그의 의도와 다르게 흘러갔다. 미술계에 격렬한 논쟁이 일었고, 작품은 바로 화제의 중심이 됐다. 비평은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 비난을 가하는 쪽은 목청 높여 한목소리로 외쳤다. <씨 뿌리는 사람>은 비참한 농부의 처지를 항의라도 하듯 하늘로 포탄을 뿌려 대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비평을 한 이들은 우람하고 거친 농민의 이미지에서 위협을 느낀 부르주아들이었다. 그들은 <씨 뿌리는 사람>이 하늘에 분노의 씨앗을 뿌리며 부자들에게 저주를 퍼붓는다고 여겼다. 진보주의 평론가들도 이 작품을 정치적으로 받아들였다. 예전 같았으면 전원적인 풍경 앞에 서 있어야 하는 사람은 귀족이나 부르주아, 유명한 인물이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밀레의 그림 속 전면에 등장하는 사람은 바로 농민이다. 그들은 <씨 뿌리는 사람>을 억압된 농민을 대변하고, 농민 찬가를 부르는 그림으로 봤다. 당시 유명한 시인이자 미술 평론가였던 테오필 고티에는 <씨 뿌리는 사람>에 이렇게 찬사를 보냈다. “이 남자의 거친 동작 속에는 웅장함과 기품이 서려 있다. 남루하지만 긍지에 차 보이는 이 인물은 마치 자신이 씨를 뿌리는 그 땅의 흙으로 칠해진 듯 보인다.” 놀랍게도 당시 프랑스 예술계는 좌우를 막론하고 이 작품을 공화주의 그림으로 본 것이다.

왜였을까. 당시 프랑스는 사회격변기였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가 지배하던 왕정이 무너지고 제2 공화국(1848~1852)이 세워졌다. 같은해 6월엔 26일간의 대규모 노동자 봉기도 있었다. 즉 민주 정치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후끈하게 달아오르던 시기였다. 노동자나 농민 같은 가난한 이들이 사회의 주인이며,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사상이 프랑스에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부르주아들이 밀레가 그린 농사꾼의 얼굴에서 비참한 생활의 흔적을 읽고 혁명의 유령이 어른거리는 인상을 받은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보수적 비평계는 인물들의 원시적인 모습에 분개하고, 사회투쟁이 재발할까 두려워하며, 혹시 체제 전복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닌지 불안해했다. 그들이 기를 쓰고 밀레의 그림을 헐뜯은 건 농민들이 또 다른 사회 폭동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재미있게도 공화주의자들도 같은 이유에서 밀레의 그림을 찬양했다. 그가 그린 농민들의 모습에서 반항의 씨앗이 움트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같은 논란이 밀레에게 꼭 나쁜 영향을 끼친 것만은 아니었다. <씨 뿌리는 사람>은 거대한 스캔들을 뿌리며 밀레의 이름을 널리 알렸고 진정한 명성을 안겨 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밀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난무하는 세간의 해석을 좋아할 수 없었다. 밀레의 당혹감은 “나는 한 번도 정치적 변론의 장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고 친구에게 고백한 편지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밀레가 당황스러워한 것은 당연했다. 왜냐하면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그는 공화주의자이기는커녕 보수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논란이 부담스런 부농의 아들, 보수주의자 밀레

유명한 화가들의 일생은 보통 과장되거나 왜곡되기 일쑤지만, 이 부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가 바로 밀레일 것이다. 보통 밀레는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프랑스 노르망디지역 그뤼시의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난 밀레는 파리에 와서 가난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잘 팔리는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결국 시골로 들어가 굶주린 농민으로 살며, 농민들의 삶에 근거한 진실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밀레는 교육을 잘 받은 부농(富農)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일본 판화를 위시한 수많은 명화들을 모으기도 했고 바르비종에서도 하녀를 둘 정도의 경제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시골행을 택한 것도 단순히 농민을 그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파리의 정치파동을 역겨워했던 데다 파리에 창궐한 콜레라로부터의 도피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1867년에 쓴 편지 속에서 드러난 밀레의 얼굴이 바로 진짜 그의 모습일 것이다. “나는 내 있는 힘을 다해 민주주의 진영을 배격합니다. 사람들은 그쪽 진영을 ‘당파’라는 어휘로 받아들여, 내게 그 명칭을 갖다 붙이려고 했었지요. 나는 그 어떤 것도 옹호할 의사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런 밀레였기에 1868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된 루이 나폴레옹이 수여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였고, 파리 코뮌이 세워졌을 땐 “광포한 정신병자들이 지성을 대신하고 있다”며 끔찍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밀레는 사실과 다르게 알려졌던 걸까. 바로 밀레의 친구이자 공무원·평론가·미술품중개업자였던 알프레드 상시에가 쓴 전기 때문이었다. 상시에는 1880년 <자연을 사랑한 화가 밀레> 전기를 출간하면서 밀레를 빈곤 속에서도 농촌을 사랑하고 농민을 그리면서 일생을 바친, 종교심 깊은 화가로 묘사했다. 밀레를 마치 성인(聖人)처럼 미화한 이 전기는 그 후 밀레를 소개하는 거의 대부분의 글에서 그대로 인용됐고, 결과적으로 밀레의 신화창조에 큰 역할을 하게 됐다.

밀레의 그림은 시간이 훨씬 지난 후에야 자신이 원래 생각했던 의도대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졌다. 시작은 미국이었다. 프랑스처럼 오랜 봉건제도나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던 미국에서는 건장한 농민 이미지에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청교도 정신이 뿌리 깊은 개척민이었던 미국인들에게 땀 흘리고 일하는 밀레의 농민상은 그저 도덕적 우월성과 인간의 미덕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그 결과 미국에서 밀레는 성인화가와 같은 존경을 받게 됐고 그의 그림 복사본은 교회·학교, 그리고 각 가정에 걸릴 정도로 대중의 우상이 됐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1970~1980년대 도시화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이들이 많던 시절, 밀레의 미술은 근대화 중인 우리 사회에 농촌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해 준 전원미술로 이해됐고, 곧 큰 인기를 누렸다. 이처럼 밀레는 오해로도, 이해로도 명성을 떨친 드문 케이스의 작가였다. 어쩌면 밀레 그림이 가지는 힘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화가의 마지막 그림> 저자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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