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아이들이 다치지 않았으니 뿌듯하죠. 그런데 한편으론 참 씁쓸해요."

지난달 26일 서울 은평구 은명초등학교에서 일어난 화재 현장에 있었던 학교비정규직 A씨. 사고 당일은 문화체험연수로 대부분 교사들이 학교에 없는 날이었다. 학교에는 100여명의 아이들이 곳곳에 있었고, 교감을 포함한 10여명의 초등·유치원 교사를 빼면 어른 중 다수는 교육공무직원·유치원 교육공무직원·방과후강사·방과후코디·스포츠강사 같은 학교비정규직이었다. A씨도 불이 난 것을 확인하고 학생들을 급하게 대피시켰다.

그런데 큰일을 겪은 뒤 학교측이 보인 태도는 실망스러웠다. 그는 "학교 관계자 누구도 '괜찮냐' '고생하셨다' 한마디를 안 하더라"며 "사고 뒤처리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도 눈치를 보면서 물어봐야 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들 무사히 대피시켰지만…

불이 나자 학교비정규직들은 발 빠르게 대처했다. 학교비정규직노조 서울지부(지부장 이미선)가 화재현장에 있었던 학교비정규직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한 상황일지를 2일 공개했는데, 학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킨 주인공들은 학교비정규직들이었다.

학교비정규 노동자들은 화재를 알린 방송이 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이리저리 발로 뛰며 학생들을 대피시켰다. 교무실무사는 돌봄교실로 달려가 화재 사실을 알렸고, 과학실무사는 체육관과 도서실로 달려가 방과후학교 수업 중인 학생들과 도서실 학생들을 내보냈다. 평소 장애인 학생이 있는 특수학급에 방송이 잘 안 나오는 것을 알고 있던 특수실무사도 화재 상황을 알리기 위해 담당교사에게 달려갔다. 건물 5층에서 내려오던 학생들을 마지막까지 대피시킨 지역사회교육전문가(교육복지사)도 학교비정규직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들은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학교 관리자가 비정규 노동자에게 화재현장에 다시 들어가라고 지시한 사실도 확인됐다. 노조는 "학교비정규 노동자도 똑같은 사람인데 더 위험한 일을 요구하고, 노력을 해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라며 "화재현장에서조차 학교비정규직은 안전할 권리마저 차별받고 위험에 내몰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부 관계자는 "최근 학부모 간담회 자리에서 학교측은 비정규 노동자들 얘기는 한마디도 알리지 않았다"며 "인정받으려 한 행동은 아니지만 단 한 마디 언급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차별의 벽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연기 채 빠지지 않은 교무실에 들어가 "학부모에게 문자 보내라"

지부는 학교측의 안전불감증 문제도 제기했다. 지부에 따르면 화재진압 중이던 오후 5시께 학교 관리자(교감·교무부장)는 교무행정지원사에게 연기가 채 빠지지 않은 교무실에 들어가 "학부모에게 화재 안내문자를 전송하라"고 지시했다. 교무실이 있는 본관은 불이 난 별관과 붙어 있어 연결통로로 넘어온 연기가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교무행정지원사가 "유독가스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자 학교 관리자는 “학생명부를 가지러 나도 갔다왔는데 왜 못 들어가냐”며 재촉했다. 화재 진압 시점인 오후 5시40분께 학교 관리자는 상황실에서 사용해야 한다며 교사 1명과 비정규직에게 노트북과 기자재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지부는 "대형 화재현장에서 두려움에 떠는 비정규 노동자에게 노트북 등을 가져오라고 한 것은 인명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해당 비정규직들은 상담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학교비정규직들이 안전할 권리를 차별받은 사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7년 경북 포항 강진 발생 당시에도 일부 학교에서 정규직 교사들은 퇴근시키고, 비정규직인 교무행정원만 학교로 돌아가 학부모들에게 문자를 발송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이미선 지부장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고 학교측을 비난할 의도는 없지만 사실은 제대로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 지부장은 "교육현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학교비정규직의 존재를 인정하고, 우리가 조금 더 자긍심을 느끼고 일할 수 있도록 불합리한 차별적 관행이 개선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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