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김사국 선생

일제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은 가장 비타협적이고 철저했던 반면 극심한 분파갈등과 지나친 국제당(코민테른) 의존으로 얼룩져 있다. 조선인의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1918년 연해주의 한인사회당, 1921년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이후 국내 서울파·화요파·북풍파 등을 거쳐 1925~1928년 조선공산당 1~4차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1930년대부터 1945년 광복까지는 국내에서 혁명적 노동조합·농민조합 운동,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크고 작은 코뮤니스트그룹으로 약화됐고 국외에서 1국1당 방침에 따라 중국·소련 공산당에 적을 뒀지만 만주와 조선 북부·연해주·화북 등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기본으로 민족해방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 가운데 초기 국내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선구자이고 당시 조선 사회운동의 지도자였던 김사국 선생을 소개하고자 한다. 1926년 5월 폐병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고 김재봉·김찬·박헌영 등 화요파가 주도한 조선공산당이 배척한 서울파의 대표라서 그런지 그의 실제 역할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김사국은 1910년대부터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3·1 운동 후 상해임시정부보다 빠른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했으며 조선민족해방운동의 독자성과 자주성, 국내기반 강화에 기초한 사회주의운동의 통일단결, 노동자·농민·청년 등 기층민중 의식화·조직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다.

고학생, 교사, 비밀 독립군, 사회주의자 

김사국(金思國, 1892~1926)은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892년 11월9일 충남 연산(連山)에서 아버지 김경수(金慶秀)와 어머니 안국당(安國堂) 사이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되던 해, 아버지가 사망해 어머니를 따라 여섯 살 아래 동생 김사민(金思民)과 금강산 유점사에 들어가서 한학을 공부했다. 그 후 경성에 올라와 보성학교에서 수학하다가 17세 때인 1908년 일본에 건너가 피혁회사 등에 다니며 고학했다. 1909년 1월 동경유학생들의 연합단체인 대한흥학회에 가입하고 기관지 <대한흥학보> 출판부원으로 활동했다. 조소앙 선생이 <대한흥학보> 주필로 있을 때였다.

김사국은 1910년 8월 한일병탄 소식을 접하고 곧 귀국해 한성중학에 입학, 1913년께 졸업해 교사생활을 했다. 1918년 6월 남만주 철령, 개원~연해주 등지를 다니며 문창범·윤해 등 대한국민의회 세력, 이동휘·홍도 등 한인사회당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경성에 돌아온 때가 1919년 2월26일이었다. 3·1 만세시위에 어떻게 참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13도 대표가 참여한 국민대회를 통해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려는 담대한 기획을 밀고 나갔다. 3·1 운동 전후 ‘조선독립단’ 일원으로 활동했고, 조선독립단은 이동휘를 집정관으로 한 신한민국정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 한복판에서 ‘한성임시정부’ 선포

1919년 4월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천도교 안상덕, 기독교 박용희·이규갑, 유교 김규, 불교 이종욱, 일부지역 대표 20여명이 모여 국민대회 계획을 확정했다. 그 연락을 위해 이규갑·홍면희 등이 상해로 떠나 국민대회의 실행은 김사국이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4월23일 13도 대표들이 종로 봉춘관에서 국민대회라는 간판을 걸고 임시정부 선포문과 국민대회 취지서, 결의사항, 각원 명단, 6개조 약법(約法)과 임시정부령 1·2호를 발표했다. 보신각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시내 곳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전단을 뿌렸다.

국민대회사건으로 구속된 김사국은 1년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20년 9월6일 석방됐다. 출감 이후 처음 개입한 단체는 동생 김사민이 간사로 활동하는 조선노동대회다. 노동자들의 상호 부조와 지적·인격적 지위 향상을 위해 1920년 5월2일 창립한 노동단체다. 또 1921년 1월 서울청년회를 창립했다. 임원진은 이사장 이득년, 이사 오상근·김명식·김사국·장덕수·윤자영 등이었는데, 초기에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함께했다. 3·1 운동 이후 전국 각 지역 청년단체들이 수없이 생겨나고 전국청년연합체를 주도하기 위해 서울청년회 건설과 강화가 절실했던 것이다. 이즈음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신사조가 빠르게 확산됐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갈등, 사회주의운동 내부의 주도권 다툼이 격화된 배경이다.

1921년 김사국은 조선청년회연합회 기관지 <아성(我聲)> 등에 신사조 관련 글을 발표하고 조선불교청년회, 각 지역 청년회와 조선노동대회의 초청으로 강연을 하는 등 맹렬히 활동하면서 그해 7월 박원희와 결혼했다. 1921년 10월에는 동경에서 김사민·박상훈·임봉순 등과 ‘사회혁명당’을 창립하고 “사람에 의한 사람의 착취 말살과 사회주의 승리의 근접” “민족혁명운동을 사회주의혁명의 1단계로 인식 (…) 전선 확립을 목적으로 한다”는 강령을 채택했다. 김사국은 1922년 1월 말 사회혁명당 2차 회의에서 갑오경장 이후 친일내각의 외무대신을 지낸 ‘김윤식 사회장’을 추진하는 조선청년회연합회와 동아일보, 친소사대주의 경향의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국내부(나중에 화요파)를 비판하고 서울청년회 강화를 통한 조선청년회연합회 재조직을 결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좌경·우경과의 원칙적 투쟁

또 김사국은 코민테른 지원자금을 사적으로 남용한 이른바 ‘사기공산당사건’을 강력히 비판했다. 1922년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3회 정기총회에서 그 관련자들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으나 거부되자 서울청년회 외 18개 청년단체가 탈퇴했다. 그해 6월13일 서울청년회 임시총회에서 장덕수·김명식·오상근·최팔용·이봉수 등 상해파 고려공산당 당원 5인을 제명했다. 이 무렵은 민족주의세력 내부가 타협적 개량적 요소와 비타협적 혁명적 요소로 분화되고, 비타협적·혁명적 민족주의자들이 점차 사회주의 경향을 갖게 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1922년 6월 사회혁명당은 해산을 결정하고 ‘통일조선공산당 창립대회 소집준비위원회’(이른바 ‘중립당’)를 결성했다. 김사국·이영·김한·원우관·정재달·신백우·윤덕병 등이 참가했다. 극심한 분열갈등과 주도권 다툼으로 자유시참변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 기반 강화보다는 자파세력 확대에 골몰하는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모두에 대한 짙은 혐오감 때문에 ‘중립당’이라는 별칭을 갖게 됐다. 1922년 1월19일 발기한 ‘무산자동지회’가 3월 ‘무산자동맹회’로 전환했는데 ‘중립당’의 합법적인 기관이었다.

김사국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가 1921년 8월 북경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결성한 이후 1922년 8월 국제공산청년회의 지도하에 서울에서 3차 중앙총국을 구성할 때 김사민·안병진·정재달·조훈과 함께 중앙총국에 참가했으나 1개월 만에 탈퇴했다. 국내에 기반을 갖지 못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주도하는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 통합대회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부터 김사국 등은 ‘서울파’로서 독자적 행보를 시작했다. 노동자·농민·청년 등에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동시에, 1922년 10월11일 김사국·이영·김영만·장채극 등이 참여하는 서울파를 만들었다. 1928년 조선공산당 4차 책임비서 차금봉, 광복 직후 장안파 공산당의 이영·정백, 1956년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의 최창익도 서울파 출신이었다.

사회주의세력 통합 노력, 그러나 실패 

김사국이 주도한 서울파는 “우리 당은 최단 시일 내에 최소한의 정치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조선의 모든 혁명세력을 민족해방운동의 통일전선의 슬로건하에 단일한 중앙으로 집중시켜야 (…) 근로대중이 이 운동의 중요한 세력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표방했다. 1922년 10월29일 자유노동조합 창립 등 노동운동에 상당한 힘을 기울이는 한편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을 야기한 ‘신생활사 필화사건’이 발생해 동생 김사민은 구속되고 김사국은 같은해 11월 말 만주로 피신했다. 서울파는 이듬해 2월20일 고려공산동맹을 창립하고 코민테른과의 상설 연락기관 설치와 코민테른의 ‘중립당’ 승인 추진을 결정한 후 김사국을 코민테른 집행위 원동부(遠東部)에 파견했다. 김사국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온갖 노력을 다 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경도된 코민테른 관계자의 비협조 때문이었다.

1923년 3월 간도 용정으로 간 김사국은 조선인 혁명가 양성을 위해 대성중학교 부설 동양학원을 창설했다. 그러나 그해 8월 일제는 ‘작탄매설사건’을 조작해 50여명의 학생들을 체포해 끝내 폐교시켜 버렸다.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국내와 연락하면서 코민테른과 고려공산동맹의 관계 회복에 애를 쓰다가 흑룡강성 영안시 영고탑(寧古塔)으로 가서 대동학원을 설립했으나 중국관헌이 해산시켜 또다시 연해주로 가서 조선 사회운동의 통일·단결을 모색했다. 1924년 5월 김사국은 폐결핵에 걸린 채 귀국한 다음 생전 마지막으로 국내외 모든 사회주의세력을 망라한 통일조선공산당 준비위 성격의 ‘13인회’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화요파는 우선 국내 통합을 위한 창당 전 코민테른과의 연락 중단을 거부하고 13인회에서 철수했다. 그 후 화요파가 주도하는 조선공산당 창당과정에서 최대 세력이자 민족통일전선을 중시한 서울파는 배제됐다.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1924년 12월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 1925년 4월 전 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 등으로 계속 활동했으나 김사국의 폐병은 더욱 악화됐다. 1926년 5월8일 평생의 동지이고 사랑하는 아내인 박원희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숨을 거뒀다. 돌이 갓 지난 딸, 김사건(金史建)과 노모를 남겨둔 채. 그가 죽은 지 1년6개월 뒤인 1928년 1월5일 박원희도 감기를 앓다가 악화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네 살 되는 딸을 데리고 쓸쓸한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남편의 유지를 이어 여성운동과 일반노동운동에 더욱 분투했던 박원희의 갑작스런 죽음을 당시 언론도 애석하게 보도했다. 생전에도 사후에도 김사국의 뜻이 잘 통하지 않았으나 생을 다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사회주의운동의 통일·단결에 노력했으며 1920년대 사회운동의 큰 흐름을 형성했던 김사국 선생 부부를 숙연하게 추모하게 된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