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김마리아 선생

1932년 11월3일자 미주 동포신문 <신한민보>는 “김마리아 양의 근황-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 : 차고 넘는 인생의 쓴잔”이라는 제목으로 3개월 전 조선으로 귀국한 김마리아의 근황을 소개하는 기사를 싣는다. 1909년 2월10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교민단체인 국민회의 기관지로 창간했고, 대한인국민회가 출범한 1910년 2월부터는 “민족 전체의 대변기관으로 자처”하던 <신한민보>에서 ‘혁명 여걸’이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근황을 소개하고 있는 김마리아는 과연 누구일까.

2·8 독립선언과 3·1 혁명에 앞장서다

김마리아는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일찍이 기독교로 개화한 만석꾼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김마리아가 자란 소래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처음 뿌리내린 곳이었고, 그가 1896년부터 남장을 하고 다녔다는 소래학교도 아버지 김윤방이 세운 기독교 학교였다.

김마리아 집안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독립운동가 집안이기도 했다. 김마리아가 조실부모하고 서울로 올라와 1905년부터 기거한 삼촌 김윤오의 집은 김형제상회와 함께 항일운동의 연락거점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또 다른 삼촌인 세브란스 의전 출신 의사 김필순은 도산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으며, 김규식·노백린·이동휘·유동렬 등 애국지사들과 교유한 항일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4명의 고모 중 김구례는 신한청년당의 당수를 맡았던 독립운동가 서병호와 부부 사이였고, 신한청년당 이사와 3·1 혁명 직후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등을 역임한 또 다른 고모 김순애는 나중에 임정의 부주석을 맡게 되는 김규식 박사와 부부 사이였다. 민족협동전선 신간회의 자매단체였던 근우회 등에서 활약한 김필례도 김마리아의 막내 고모였다.

정신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광주 수피아학교와 정신여학교에서 수학교사를 하던 김마리아는 1914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 중에도 김마리아는 여성 조직에 적극 나서는데, 1917년에는 고모 김필례에 이어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의 회장에 선출된다. 이때 기관지로 발행한 <여자계(女子界)>는 남녀평등사상에 기반한 여성운동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잡지 역할을 한다.

김마리아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조선청년독립단 대회(2·8 독립선언 대회)에 참석했던 김마리아는 행사 직후 일경에 체포되지만, 풀려나자마자 독립운동을 확산시키고 조선에서 여성계를 조직하고자 2·8 독립선언서를 몰래 국내로 가지고 들어온다.

귀국한 김마리아는 3·1 혁명 당시 황해도 해주에서 만세운동을 조직하다가 서울로 돌아와 여성계 조직을 논의하던 중 정신여학교 학생들의 배후로 지목돼 다시 체포된다. 남산 경무총감부로 끌려간 김마리아는 ‘여성계 조직’ 계획을 파헤치려는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버텨 낸 끝에 5개월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다. 하지만 이때 생긴 메스토이병은 고질병이 돼 김마리아를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히게 된다.

최초의 비밀 여성 조직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온몸이 망가진 상황에서도 김마리아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항일운동에 뛰어든다. 3·1 혁명 직후인 3월과 4월 독립운동 과정에서 감옥에 간 지사와 그 가족의 구호를 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혈성단애국부인회(회장 오현주)와 대조선독립 애국부인회(회장 김원경)가 6월에 이르러 통합됐지만, 독립운동의 열기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조직도 지지부진해지자 출옥한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하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가 같은해 9월 전국적인 여성독립운동 조직으로 새롭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김마리아와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여성운동 역사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1928년 1월 동아일보에 “조선여성운동의 사적 고찰”을 게재한 견원생(필명)은 조선 여성운동을 세 시기로 나눠 설명했는데, 그에 따르면 애국부인회 활동기는 여성운동 1기에 해당했다(여성동우회 활동기는 2기,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자매단체 근우회 활동기는 3기로 나눴다). 1년 후인 1929년 동아일보 최의순 기자 역시 신년특집으로 3회에 걸쳐 연재한 “10년간 조선 여성의 활동”에서 여성운동의 역사를 배태기·활약기·침체기로 구분해 설명하는데,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창립에서부터 각 지방 여성청년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를 배태기로 규정했다.

일제의 혹독한 고문도 이겨 낸 ‘혁명 여걸’

하지만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전임 회장 오현주의 배반으로 일경에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됐고, 1919년 11월28일 일제의 탄압을 받아 간부들이 연행되면서 무너지고 만다. 김마리아 역시 이때 체포돼 종로서를 거쳐 대구로 이송된 후 다시 한 번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김마리아와 동료들은 조직의 실체를 숨기기 위해 조사 과정은 물론 재판 과정에서도 “인격수양과 여성교육을 보급하는 단체인데, 시류에 편승하려고 단체 명칭이나 취지서에 ‘대한민국’이나 ‘국권확장’ 같은 표현을 썼을 뿐”이라고 맞선다. 결국 연행된 52명 중 43명은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방면됐고, 핵심 간부 9명만 기소된다.

경무총감부에서 김마리아를 신문한 바 있는 가와무라(河村靜水) 검사를 대구로 옮기면서까지 혹독한 수사를 벌인 일제는 안재홍의 대한청년외교단과 관련성까지 캐내기 위해 김마리아에게 고춧가루를 탄 물고문은 물론 끔찍한 성고문마저 자행한다. 이로 인해 김마리아는 3·1 혁명 직후 구속돼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 생긴 메스토이병이 악화한 데다 극도의 신경쇠약까지 더해져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 처한다.

결국 세브란스 의전의 스코필드 박사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고문에 대해 직접 항의하는 등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김마리아는 결사부장 백신영과 함께 병보석으로 석방돼 거주와 면회 제한을 받은 채 블레어 목사가 있는 대구 동산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

‘박헌영 탈출 사건’보다 7년 앞선 ‘김마리아 탈출 사건’

1925년 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된 박헌영이 1927년부터 시작된 재판에서 박순병의 고문사에 대해 항의를 주도하다 일제의 집중 폭행으로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인 끝에 병보석으로 나온 후, 1928년 12월 만삭인 부인 주세죽과 함께 조선을 탈출한 일은 지금도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유명한 사건이다.

그런데 그보다 7년 전인 1921년 ‘김마리아의 조선 탈출 사건’ 역시 박헌영의 조선 탈출 사건 못지않게 드라마틱했다. 1921년 6월29일 김마리아는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입원해 있던 세브란스 병원을 몰래 빠져나와 인력거를 타고 유유히 사라진다. 김마리아는 인천으로 가서 일주일을 머문 다음 배를 타고 산둥반도 웨이하이웨이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 극적인 탈출 뒤에는 선교사 매큔의 도움과 임시정부 특파원 윤응념의 활약이 있었다.

상하이에 도착한 김마리아는 192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황해도 의원을 맡기도 하는데, 이는 여성 최초의 임시의정원 의원이었다. 이듬해에는 안창호와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통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조를 추구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김마리아는 희망을 잃지 않고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꿈꾸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미국 유학과 귀국,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일제에 맞서다

김마리아는 미국에서 파크대학을 거쳐 시카고대 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콜롬비아대 사범대학원과 뉴욕 신학교에서 공부한다. 김마리아는 1927년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대학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을 찾아온 <중외일보>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한다.

“수년 뒤에는 귀국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법 당국이 자못 염려할 겁니다. 고국 여자계 사상이 날로 진보하고 있으나, 내가 돌아가도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없겠지요.”

병보석 상태에서 조선을 탈출한 김마리아의 법정 시효 10년은 1931년 5월이었다. 김마리아는 장로교선교회를 통해 타진한 끝에 1932년 7월에 이르러 귀국을 결정한다. 당시 김마리아의 귀국은 동아일보가 “화제의 김마리아 양”을 3회에 걸쳐 연재하는 등 장안의 핫이슈였다. 김마리아는 애당초 경성 주거 제한을 전제로 입국이 허용됐기 때문에 원산의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에서 일제로부터의 ‘취직 정지’ 명령이 끝난 다음해 초부터 교편을 잡는 것으로 조선에서 활동을 다시 시작한다.

▲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김마리아는 성경 강의와 함께 농촌계몽운동에 나서는 등 사회적 기독교 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교회 내 남녀차별 문제를 제기하면서 조선기독교 여성운동이 나아갈 바를 제시하기도 한다. 특히 여전도회 회장(7~10대)을 맡아 여성의 역할을 높이는 활동에 앞장서는가 하면, 1937년부터 본격화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장로회 총회마저 굴복한 상황에서도 김마리아가 이끈 여전도회는 이를 끝내 거부한다. 이로써 1943년에는 마르타윌슨 신학원마저 끝내 문을 닫게 된다.

여기에 강화된 일제의 감시와 압박 속에 건강이 다시 악화돼 혈압으로 쓰러진 김마리아는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던 중 그만 순국하고 만다. 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의 일이었다. 김마리아의 주검은 화장해 대동강에 뿌려졌다.

지금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위 무후선열제단에는 ‘혁명 여걸’ 김마리아의 작은 위패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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