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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주년 연중기획-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24] ‘신출귀몰’ 이수흥, 혈혈단신으로 일제 식민지배를 뒤흔들다

기사승인 2019.08.12  08: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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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이수흥 선생(1905~1929)

“권총을 가진 청년 한 명이 경성 시내 동소문파출소를 습격하여 파출소에 근무하던 일본인 순사 한 명을 난사하고는 시내로 유유히 사라졌다.”

1926년 7월12일자 한 언론의 기사 내용이다. 이 사건 목격자로 혜화동에서 잡화상을 하던 이재근은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그 청년은 참 날래입디다. 총에 맞고 숙직실로 소리를 지르며 쫓겨 들어가는 순사를 따라 들어가며 쏘고 나서는 (중략) 조금도 다른 기색이 없이 고등상업학교 앞다리까지 가서는 손에 든 권총을 호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걸어갑디다. 그리고 키는 크지 않으나 몸은 통통하여 날래임이 보이는 삼십세 가량의 청년인데 얼굴은 둥그스름합디다.”

일제는 이후 4개월간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무려 3천여명의 경찰을 동원하는 등 경성 시내와 경기도 일대를 사실상 “계엄 상태”로 몰고 갔고, 당시 언론도 여러 차례 호외를 발행하는 등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19살 이수흥

동소문파출소 습격사건을 시작으로 4개월간 경성과 경기도 일대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일제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의 주인공은 사건 직전 만주에서 경성으로 들어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만육군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 이수흥(1905~1929)이었다.

경기도 이천에서 한학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수흥이 만주로 간 것은 19살 때인 1923년의 일이었다. 만주 관전현에서 아버지 이일영과 친분이 있던 대한의군부 총장 채상덕(1862~1925)을 만나 본격적인 무장독립투쟁의 길로 뛰어들었다. 이수흥은 김좌진의 신명사관중학교에 입학해 1년6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통의부를 거쳐 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로 활동한다. 이 시기 이수흥은 채상덕으로부터 “나는 늙고 기력도 쇠퇴해 활동할 수 없는데, 너는 장래가 있는 청년이므로 조선 독립을 위해 크게 일해 달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다른 선배들로부터도 “채상덕의 뒤를 이어 조선 독립운동을 위해 일해 달라”는 말을 들을 만큼 촉망받는 항일독립운동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수흥이 만주에 도착한 1923부터 1925년까지는 만주지역 무장투쟁 재편기였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승리에 빛나던 1920년의 무장투쟁은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위기를 맞는다. 만주의 독립운동은 1922년 대한통군부 결성과 대한통의부로의 확대·발전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듯했으나 주도세력 분열로 결국 참의부와 정의부, 신민부로 분립하는 형국이 됐다. 여기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와 봉천군벌 장쭤린 간에 ‘재만 한인의 무기 휴대를 금하고, 일제가 지명하는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일본 경찰에 인도한다’는 내용을 담은 미쓰야 협정(1925년 6월11일)이 체결된다. 일제 자료에서 확인되는 독립군의 국내 진공작전 횟수가 1924년 560여건, 1925년 270건에서 1926년 69건, 1927년 16건, 1930년 3건으로 급감한 이유다.

여기에 1925년 3월 고마령에서 일제의 기습으로 이수흥이 속해 있던 참의부 제2중대장 최석순(?~1925)을 비롯한 29명이 전사하는 참변을 당했다. 그 충격으로 채상덕이 자결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5척 단신으로 혈혈단신 경성 잠입

이수흥은 침체돼 있는 무장투쟁을 보고 새로운 돌파구 마련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조선 사람에 대해 가혹한 정치를 하는 총독과 총독부의 대관을 암살하고” “임기응변 기회만 있으면 일본의 정치를 교란시킬 대사업을 위해” 만주에서 결혼한 김씨와 외동딸마저 남겨 둔 채 혈혈단신 경성으로 잠입한다.

이때 이수흥이 몸에 지니고 온 무기는 채상덕이 신명사관중학교 졸업 선물로 준 브로닝식 권총(탄환 29발)과 모젤식 권총(탄환 150발) 각 1정이었다. 한 자루는 조선총독부에서 급사로 일하고 있는 죽마고우 유남수에게 줘서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는 데 사용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경성 도착과 동시에 유남수가 총독부 급사를 그만두고 이천 자택으로 돌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이수흥은 유남수를 만나기 위해 고향인 이천으로 향한다.

동소문파출소 습격사건

이천으로 향하던 중 밤 11시께 동소문파출소 앞을 지나다 자신의 권총 소지 사실을 눈치채고 뒤따라오는 일본 순사를 발견한 이수흥은 그 순사를 향해 권총을 난사했다. 다른 순사의 추격 의지를 꺾기 위해 동소문파출소 안에도 두 발을 발사한 후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간다. 이것이 1926년 내내 경성을 시끄럽게 한 동소문파출소 습격사건이다.

이수흥은 광진을 통해 한강을 건넌 다음 이천 유남수의 집에 숨었다. 일제는 동소문파출소 습격사건과 관련해 모든 경찰력을 동원해 100여명의 애먼 조선인을 취조하고도 그 어떠한 단서조차 찾지 못한 채 허둥댄다. 심지어 한 달이 지난 그해 8월12일에는 만주에 근거해 북경과 국내를 넘나들던 다물단의 황익수를 ‘범인’으로 지목해 발표하는 해프닝까지 벌인다.

군자금 마련 위해 동분서주, 경성과 경기 일대 뒤흔들어

이수흥은 이천에서 유남수와 유택수 형제를 동지로 포섭한 후 9월7일 군자금 마련을 위해 유택수와 함께 안성의 부호 박승륙의 집을 방문한다. 박승륙의 집은 1년 전에도 독립군자금 마련을 위해 다물단의 황익수가 다녀간 곳이었다.

하지만 황익수와 달리 이수흥은 박승륙의 집에서 군자금을 마련하는 데 실패한다. 박승륙은 없고 대신 만난 아들 박태병이 군자금 제공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심지어 강한 반발과 함께 도주하자 이수흥은 박태병을 저격하고 일꾼 두 명에게 부상을 입힌 채 현장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일제는 이번에도 허둥대며 안성사건 범인을 김덕영이라는 청년으로 발표한다.

경성을 거쳐 다시 이천 유남수의 집으로 잠입한 이수흥은 이번에는 여주의 부호로부터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9월28일 이민응의 집을 방문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선민족을 위해 회사를 설립해 다수의 빈민을 구제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는 이민응의 교묘한 말에 속아 “비록 방법이 달라도 모두 조선 민족을 위해 일하는 것은 같으므로 이제부터 크게 노력해 달라”는 격려의 말까지 남기고 맨손으로 돌아오고 만다.

유남수로부터 속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수흥은 이민응을 응징하기로 결심한다. 인민의 고혈을 짜고 있는 이민응의 현방식산주식회사 금고를 탈취해 군자금으로 충당하기로 한 것이다.

10월20일 현방식산주식회사에 도착한 이수흥은 우선 근처에 있는 현방경찰관주재소를 제압해야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고 주재소를 습격한다. 주재소 습격사건은 너무 싱겁게 끝났다. 발사한 권총이 불발하는 사이 순사 2명이 곧바로 달아나 버린 것이다.

다시 현방식산주식회사로 돌아왔을 때는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문을 닫아 버린 뒤였다. 이수흥은 계획을 급히 수정한다. 인근 백사면사무소를 습격해 조선인으로부터 징수한 세금을 비롯한 ‘공금’을 탈취하고 만주로 탈출한 다음 잠잠해지면 재차 들어와 원래 목적을 달성하기로 했다. 곧바로 백사면사무소로 치고 들어간 이수흥은 마침 숙직을 하던 조선인 면서기 송천의를 위협해 ‘독립군자금이 필요하니 금고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송천의가 배신하면서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안내하는 척하던 송천의가 기회를 틈타 달아나며 “강도다!”라고 외친 것이다. 이수흥은 면사무소 금고털이를 포기하고 송천의를 저격한 후 이천읍 유남수의 집을 거쳐 안성으로 피신한다(5일 후 일어난 경성 수은동 전당포 대성호 습격사건은 유택수가 단독으로 벌인 사건이었다).

안성에서 이수흥은 수원의 누이로부터 아버지의 부고를 접한다. 이수흥은 뒤늦게나마 누이 집에 가서 상복을 입고 묘소를 참배하며 자식의 도리를 다한다.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던 이수흥

이렇듯 신출귀몰하고 대담한 행적을 보이던 이수흥이 11월6일 갑자기 일경에 체포되고 만다. 후일을 기약하며 만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이수흥이 경비 마련차 빌려준 돈 400원을 받기 위해 이천 이준성의 집을 방문한 다음날 오전이었다. 사건의 주인공이 5척 단신이라는 사실에 근거해 샅샅이 뒤지고 있던 이천경찰서에 밀고한 자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일제는 이수흥에게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공갈미수·살인·살인미수·강도살인·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등 무려 6개의 죄목을 씌워 기소한다. 재판은 이수흥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겠다고 구름같이 밀려오는 조선인들로 물샐틈없을 정도였다. 수사 과정이나 재판 과정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일제에 맞섰던 이수흥은 1928년 7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 이수흥은 사형판결을 받고 돌아오면서도 너무 태연해 주변에서 무죄판결이나 받았는지 의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1심 판결 이후 공소를 포기한 이수흥은 이듬해 1929년 2월27일 유택수와 함께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서 처형된다. 동아일보는 “형무소 평총 교회사 앞에서 장시간 자기의 가슴에 품은 민족주의적 연설을 열렬히 하고 최후의 집행을 당하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수흥 선생은 이미 최후진술을 통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밝힌 바 있었다.

“나는 일제 재판부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내가 기필코 대한독립을 성취하려 했더니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고 감이 원통할 따름이다. 우리 동포 여러분들은 끝까지 싸워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해 주시기 바란다.”

김학규 labortoday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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