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현철 금속노조 경기금속지역지회 수석부지회장

2016년 촛불항쟁 이후 한국 사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노동현장에도 촛불의 영향은 깊숙이 끼쳤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존중 사회’ 표방은 노동자 마음을 흔들었다. 숨죽였던 노동자들이 기지개를 켰다. 반월시화공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5년 이후 단 한 곳도 설립되지 않은 노조가 2016년 말부터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반월시화공단에 13개 민주노총 소속 사업장이 새로 만들어졌다. 특징적인 것은 사용자 저항이 적어진 점이다. 일단 노동조합은 인정하고, 세부적인 내용을 조율하는 방식으로 변했다. 노동조합 자체를 부정하던 촛불 이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던 것이 한국히타치화성전자재료에서 탁 막혔다. 이것이 일본자본의 노조혐오 때문인지, 회사가 자문 받고 있다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지시인지, 대표이사 개인의 일탈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노동존중 사회’를 표방했던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이 친기업으로 후퇴하면서 나타난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용노동부 태도가 그러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새로운 노조를 안착시키는 데 있어 노동부 역할이 컸다. 회사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 대부분 사용자는 충격을 받는다. 노동부가 그 충격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지난해까지 노동부는 노사 간 큰 마찰 없이 노동조합을 자리 잡게 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 노동부는 기계적 중립을 지키고 있다. (이는 사용자를 편드는 것과 같다.) 이 모습 역시 촛불 이전 행태 데자뷔다. 눈치 빠르고 감각적인 사용자들은 정부 태도에 민감하다. (이것은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올해 3월31일 한국히타치화성전자재료의 생산직 직원들이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회사의 일방적 지시와 직원 의견이 무시되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노동조합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회사는 처음부터 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교섭을 요청하자 “회사 밖에서 근무시간 외에 교섭하자”는 답변을 보내왔다. 어디서 많이 보던 익숙한 풍경이다. 2016년 촛불항쟁 이전 회사에 노조가 생기면 많은 회사들은 일단 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양태가 “회사 밖에서, 근무시간 외에 교섭하는 것이 우리 회사의 ‘원칙’이다”는 주장이었다. 그 뒤 모습은 대체로 불성실교섭(노조요구안 수용불가)·파업·직장폐쇄로 이어지는 노조파괴 시나리오였다. 일본자본 한국히타치화성전자재료도 똑같은 수순을 밟고 있다.

회사는 불성실 교섭으로 일관했다. 교섭안을 제시하기로 한 날 교섭안을 제시하지 않고, 정작 제출한 교섭안은 최저수준이었다. 전차 교섭에서 이미 합의한 사항을 번복하는가 하면, 교섭위원들은 ‘결정권한이 없다’면서 결정을 미뤘다. 취업규칙에 있는 문구를 단체협약에 넣자는 노조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노조는 한 번에 수십 만원씩하는 호텔이 아니라 사내에서 교섭하자고 했으나 사측은 끝내 거절했다.

8월19일 경기지방노동위원회는 조정중지 결정을 내렸다. 경기지노위는 “△회사 내 교섭 △조합비 일괄공제(조합원의 동의를 얻어 조합비를 월급에서 공제해 노조통장에 입금해 주는 것)를 받아들이면 조정기간을 연장하겠다”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이 정도는 노동조합을 인정하는 최소한의 요구이므로 회사에서 수용하면 파업을 하지 않고 노사 간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 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회사는 거부했다.

노조는 8월21일부터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파업 3일째인 지난 8월23일 노조 조합원들은 섭씨 30도가 넘는 불볕더위를 피해 회사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자 회사 대표이사는 “휴게실에서 나가라”고 했다. 휴게실은 쟁의행위 전부터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생산직 직원들이 자유롭게 사용하던 공간이다. 조합원들만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부당노동행위이자, 불볕더위를 피해 쉬러 온 조합원들을 밖으로 내모는 행위는 반인권적이다. 버티는 조합원들에게 대표이사가 “다음 카드 알지? 직장폐쇄”라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그 악명 높은 ‘노조파괴 시나리오’를 가지고 노조 파괴공작을 시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만일 대표이사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다음 시나리오는 직장폐쇄일 것이다. 그리고 노조를 탈퇴한 조합원들만 선별적으로 복귀시키고, 복귀한 조합원들로 복수노조를 만드는 시나리오. 이 시나리오가 다시 살아나 노조파괴용으로 사용된다면 ‘노동존중 사회’는 종말을 맞을 것이다.

합리적 노사관계, 상생의 노사관계는 사용자의 막무가내 앞에서 막힌다. 노동조합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촛불항쟁 이전으로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퇴행이다. 이 퇴행을 막지 않으면 노동존중 사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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