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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주년 연중기획-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27] 박차정, 여성해방도 민족해방도 일제 타도로부터

기사승인 2019.09.02  08: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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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조선의열단복을 입은 박차정 선생(1910~1944).<민족문제연구소>

박차정(朴次貞)은 조선이 불법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강제 병합된 1910년 부산 동래에서 아버지 박용한(朴容翰)과 어머니 김맹련(金孟蓮) 사이에 태어났다. 3남2녀 중 넷째. 아버지 박용한은 일찍이 신학문을 배운 인텔리로서, 박차정이 아홉 살이던 1918년 1월 일제의 무단통치를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국지사(憂國之士)였다. 그 뒤 어머니가 홀로 오남매를 키웠다.

집안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외가 쪽으로는 주시경 선생의 제자이자 한글학자였던 김두봉이 어머니의 사촌이었고, 중국에서 약산 김원봉과 의형제를 맺고 활동했던 김두전은 육촌이었다. 그의 두 오빠도 부산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이러한 가정 배경은 차정으로 하여금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항일의식을 품게 만들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조선소년동맹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한 박차정은 1925년 동래여고 전신인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호주 출신 선교사들이 세운 일신여학교는 민족정신 함양을 중시해 조선어와 역사·지리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특히 3·1 운동 때에는 “당시 전국에서 발발한 2천건 이상의 만세의거 중 준비 과정부터 실행까지 여학생들이 주도한 것은 일신여학교의 3·11 만세의거가 유일무이”라 할 정도로 항일의식이 남다른 학교였다.

가정환경과 더불어 이러한 학교 분위기 역시 그가 항일의식을 높이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항일의식에 눈뜨다

이후 박차정은 조선청년동맹과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槿友會)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新幹會) 동래지회 회원 등으로 활동했다.

특히 박차정이 전국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여성운동과 민족운동 지도자로 부상한 것은 근우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근우회는 좌우합작을 통한 민족 유일당 운동으로 1927년 창립된 신간회의 자매단체다. 근우회는 기독교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계열 여성단체와 사회주의계열 여성단체들이 모두 참여한 여성운동 통합조직이었다. 근우회는 신간회와 같이 ‘반제반봉건’을 기치로 내걸고, 자신의 강령으로 첫째 “조선여자의 공고한 단결을 도모”하고, 둘째 “조선여자의 지위 향상을 도모함”을 내세웠다. 그리고 행동강령으로 “여성에 대한 일체의 차별 철폐” 등을 내세웠다.

근우회는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 영향으로 1930년 1월에 이화·숙명·동덕 등 서울 소재 11개 여학교에서 일제히 벌어진 학생시위를 배후에서 지도했다. 박차정은 일제에 의해 이 사건 배후세력으로 지목돼 허정숙과 함께 구속된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구속과 석방을 반복하다 결국 경성지방법원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근우회 통해 전국적 지도자로 부상하다

이 사건 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던 박차정은 1930년 의열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가 보낸 청년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리고 1931년 3월 ‘운명의 남자’ 약산 김원봉과 만나 결혼하게 된다. 이후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의 핵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약산을 도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창설에 앞장섰던 박차정은 개교 후 여자부 교관으로서 교양과 훈련을 담당한다. 그리고 1935년 7월 남경에서 민족혁명당이 결성된 다음, 1936년 7월16일에 지청천 장군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족혁명당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여성들을 민족해방운동에로 인입하기 위해 활동한다. ‘남경조선부녀회 선언문’에는 박차정의 여성해방·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인식이 잘 녹아 있다. 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조선의 여성은 오랫동안 전통적 속박으로 인권이 유린돼 왔고 다시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생존권을 박탈당함으로써 전통적 속박에 의한 가정의 노예일 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주의 약탈시장의 상품으로 임금노동의 노예로 전락하게 됐다. (…) 우리 조선부녀를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고, 또 우리를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다. 우리들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이처럼 여성해방과 민족해방 그리고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박차정은 대중선전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임철애라는 필명으로 조선민족전선연맹 기관지인 <조선민족전선> 창간호에 실린 ‘경고일본적혁명대중(敬告日本的革命大衆’이라는 글에서 그는 “일본제국주의는 중국과 조선, 그리고 일본 민중의 적이므로 우리들은 반드시 긴밀하게 연합해 공동의 적을 타도하고 진정한 동아시아의 평화를 건설하자”고 호소했다. 특히 일제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니 “일본 혁명대중들이 국내의 혁명전쟁을 일으켜 파쇼 군벌을 제거하는 것이 자유와 해방을 얻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1938년 10월10일 조선민족전선연맹은 항일무장투쟁 역량으로써 중국항전 참가, 일제 타도, 조국해방을 임무로 하는 조선의용대를 창설한다. 박차정은 조선의용대에서 22명으로 구성된 부녀복무단 단장을 맡아 활동하게 된다.
 

▲ 중국에서 치러진 박차정 선생 장례식. 남편 약산 김원봉(사진 중앙)이 해방 후 유골을 가져와 자신의 고향인 경남 밀양에 안장했다.

중국으로 망명, 의열단원이 되다

조선의용대의 부녀복무단장으로서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 싸우던 박차정은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게 된다. 이 부상으로 고생하던 그는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조국해방을 불과 1년 남짓 남겨둔 1944년 5월27일 이역만리 타국에서 서른네 해 동안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해방 후 박차정의 유골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온 김원봉은 부인을 가까이에 두고자 자신의 집 뒤편에 있던 밀양 송악마을 공동묘지에 박차정을 안장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그의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여성으로서는 유관순 열사 이후 두 번째였다.

영화 <암살> 흥행으로 약산 김원봉이 재조명을 받으면서 박차정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는 듯했으나 그것도 잠시. 자유한국당과 보수언론, 극우세력들은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를 두고 또다시 퇴행적인 색깔논란을 일으켰다. 문 대통령이 추념사에서 1941년 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에 “무정부주의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으며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일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말한 것을 두고 일제히 “문재인은 빨갱이”라며 공격에 나선 것이다.

유관순 열사 이후 두 번째 건국훈장, 그러나…

이러한 행태에 대해 지난 8월20일 국회에서 열린 ‘조선의열단과 약산 김원봉’이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회의에 참석한 김삼웅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는 “독립전쟁의 영웅 김원봉은 용납할 수 없는 공산주의자이고, 주체사상가 황장엽은 무궁화장을 받은 애국자로 추앙하는…”이라며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했다.

같은 자리에서 윤경로 전 한성대 총장은 한 원로학자의 말을 빌려 “한국독립운동사상 가장 불행한 인물이 바로 약산 김원봉이라고 했다.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은 약산 김원봉의 서훈 논란과 관련해 “현재 기준상 (독립유공자 서훈은) 불가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아가 기준 개정을 통한 서훈 추진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럴 생각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것이 3·1 만세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이념의 좌우를 떠나 민족해방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항일선열들이 지하에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우리 사회의 오랜 기득권자들인 보수정객들, 수구언론들은 진작에 무덤으로 들어갔어야 할 퇴행적인 색깔논쟁을 부추기고 있지만 세상은 결코 그들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박차정의 모교인 부산 동래여고에서는 사단법인 박차정의사숭모회를 운영하고 있다. 교내에는 박차정과 관련된 자료들을 전시해 후배들이 올바른 역사인식을 갖출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학교 역사박물관에서도 박차정을 비롯해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선배 열사들을 기리고 있다. 또 동래여고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만남의 광장’에는 총을 든 박차정의 동상이 당당하게 서 있다. 매년 5월27일에는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분단으로 먹고사는 ‘악마’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려 세우려 하지만 부질없는 일. 희망은 언제나 미래세대들에게 속하는 법이다.

정용일 labortoday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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