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에 있는 ‘동북열사기념관’ 내 양림(사진 왼쪽)과 이추악(사진 오른쪽) 사진과 이추악의 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바치리(血淚最後一滴血)>의 악보(사진 가운데).

동북지역 두 여성, 항일영웅의 하나

일제 강점기 만주는 한국 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한 무대였다. 1910년대에는 신흥(무관)학교 등의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이, 1920년대에는 봉오동·청산리 승전 등 독립군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1931년 9·18 사변(만주침략) 이후 민족계열 독립군은 사실상 막을 내리고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항일유격투쟁이 중심이 된다.

동북지역(만주)에서 벌어진 항일무장투쟁에서 조선인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조선인들은 초기 무장유격대 조직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조중연합부대인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 일군·괴뢰(僞)만군과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벌일 때에도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인의 항일투쟁은 주민 다수를 차지했던 동만주지역(북간도, 지금의 연변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서간도로 불리던 남만주지역과 북만주지역에서도 대단했다. 이추악은 동북지역 항일투쟁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한국에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북지역에서는 그 명성이 자자하다. 중국인 조일만과 함께 ‘두 명의 동북지역 항일여성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어서 동북지역 조선인들의 자부심이 되고 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바치리

이추악(李秋岳, 1901~1936)은 평안남도 중화군(현재는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금주(金錦珠)이고, 장일지(張一志), 류명옥(柳明玉)으로도 불렸다. 그녀는 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힘든 생활 속에 자랐으나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이추악은 중학 시절 착한 심성과 포용력으로 ‘큰언니’ ‘선생’으로 불리며 주변 학생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녀는 동갑내기 남학생 김훈(후에 양림으로 통함)과 함께 민족 독립을 고민하면서 자연스레 연인으로 맺어졌다. 1919년 가을 3·1운동을 주도했던 양림(김훈)은 일제의 체포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게 됐다.

양림이 떠나고 이추악은 반일 활동을 계속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제의 감시망은 좁혀져 왔다. 1924년 늦가을 이추악은 양림이 있는 중국으로 향했다. 이때 이추악은 조선을 떠나는 심정을 시로 지었다. 그의 시는 후에 중국어로 번역돼 리천(李川)이 곡을 붙였다. 노래 제목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바치리(血淚最後一滴血)>인데, 현재 양림-이추악의 사진과 함께 악보가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의 동북열사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모스크바 동방공산대학 유학

1924년 6월16일 중국 광주에 황포군관학교가 문을 열었다. 운남 강무학당을 졸업한 양림은 교관이 됐고, 이추악도 새로운 생활에 적응했다. 조선인 교관 중에는 최석천(최용건)과 전광(오성륜)도 있었다.

1925년 어느 날, 양림은 아내에게 혁명가에 어울리는 새로운 이름을 제안했다. 양림은 저명한 근대 중국의 여성운동가인 추근(秋瑾)과 남송 시기 금나라의 침략에 맞섰던 명장 악비(岳飛)의 이름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서 추악(秋岳)이라고 지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이추악으로 불렸다.

1926년 7월9일 총사령관 장개석의 지휘 아래 약 10만명의 국민혁명군 8개 군이 동·중·서 세 방향으로 공식 북벌전쟁을 시작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 수백 명의 조선인 학생들도 국민혁명군에 배치돼 북벌전쟁에 뛰어들었다.

1927년 2월12일 황포군관학교 무한 분교가 개교돼 6천명의 신입생이 입교했다. 이때 사상 최초로 200여명의 여성대가 조직됐다. 후에 북만 항일투쟁의 뛰어난 두 명의 여성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조일만과 이추악이 동기로 여성대에 함께 들어갔다.

그러나 장개석의 1927년 4·12 반공쿠데타로 정세가 급변했다. 수많은 공산당원이 체포·학살됐다. 위기를 모면한 양림과 이추악은 그해 11월 유백승 등 30여명과 함께 소련 유학길에 올랐다.

양림의 유격대 조직사업 지원

1930년 봄 이추악과 양림은 하얼빈으로 갔다. 10월 양림은 연변에서 동만특위 서기 료여원·왕경·류지원·이용·주건·이용국과 함께 동만특위를 구성했다. 1929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 발표 후 중국에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1국1당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동만특위와 만주의 당조직은 조선인이 주도했다.

1931년 9월18일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정세가 급변했다. 만주성위는 9·18 사변 후 반일유격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경험이 많은 양림을 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에 임명했다. 이추악도 성위 소재지인 하얼빈으로 소환돼 부녀부 책임을 맡았다.

1932년 봄 양림은 남만지역에 파견돼 유격대 조직사업을 지도했다. 양림은 반석에서 이홍광과 함께 농민폭동을 잇따라 조직했고, 9·18 사변 후 조직한 ‘반석노농유격대’(대장 이홍광)를 ‘반석노농의용군’으로 개편했다. 이는 후에 남만유격대와 동북항일연군 1군으로 발전한다. 1932년 봄부터 여름 사이 양림의 지도 아래 동만의 화룡·연길·왕청·훈춘 등지에서 유격대와 유격근거지가 조직됐다. 초기 동북지역 항일유격대 조직에서 양림의 역할이 매우 컸고 동지로, 아내로 이추악의 숨은 역할도 중요했다.

이추악, 북만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다

1932년 7월 양림은 중국공산당중앙 서기 주은래의 지시에 따라 동북을 떠나 강서 중앙소비에트로 갔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 노동 및 전쟁동원위원회 참모장, 홍군 23군 군장 등 군의 요직을 맡아 크게 활약했다. 양림이 동북지역을 떠난 다음 활동무대를 북만지역 주하현(현재의 상지시)으로 옮겼다. 이추악은 양림이 떠날 때 임신 중이었는데 이곳으로 온 뒤 사내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는 돌도 되지 않아 사망했다. 그녀는 폐병에 걸려 악전고투 끝에 불굴의 의지로 이겨 냈다.

1934년 1월 강서소비에트에서 중국공산당 임시중앙위원회 6기 5차 전원회의와 중화소비에트 2차 대표대회가 차례로 열렸다. 만주성위 조직부장 하성상은 두 회의에 참석해 조선족대표로 참석한 양림을 만났다. 만주로 돌아오는 하성상에게 모택동이 이추악을 강서소비에트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만주성위는 이추악을 강서로 보내기로 결정했지만 이런 사실이 이추악에게 전달됐을 때에는 국민당군이 ‘5차 토벌전’을 전개하고 있어서 봉쇄망을 뚫고 중앙소비에트 안으로 들어가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또한 그해 10월17일에는 양림이 2만5천리 대장정에 오른 후였다. 이추악은 모든 것을 “조직에 맡기고 혁명의 길에 매진”했다.

대중활동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다

1934년 2월부터 8월까지 이추악은 철북구위 서기에 임명돼 연방특별지부 개편사업을 이끌었다. 그해 8월 이추악은 철북구위 서기를 조일만에게 넘기고 연방특별지부 서기로 임명돼 연수·방정지구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이 시기 일군과 괴뢰만주군의 대공세로 조상지가 이끄는 항일유격대가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이추악은 “인민대중을 발동, 유격근거지를 확대하고 광범위한 항일유격전을 전개하라”는 지시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중하진 천대산에 밀영을 세워 부상병을 치료하고, 병기수리공장을 세워 무기를 제조했다. 대중조직을 통해 적정을 탐지해 정보를 제공하는 등 유격대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1935년 3월 이추악은 방정현성 내 적정을 탐지해 조상지의 현성 습격작전을 성공적으로 도왔다. 조상지의 주력부대가 이동한 뒤 류해도가 이끄는 동북인민혁명군 3군1단이 남았다. 류해도 부대는 이추악 등 반일대중조직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다카키 군조의 일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 무렵 이추악의 기지로 자위단과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성내에서 만든 수십 켤레의 가죽신을 유격대에 보낸 사건은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 회자됐다.

1936년 2월 이추악은 동북항일연군 3군 활동의 요충지인 통하현으로 옮겼다. 능력을 인정받은 이추악이 이곳에서 대중조직 사업을 펴도록 한 것이다. 이후 그녀는 서북하·북륙방·하서남툰 등 9개 마을과 부근 지역을 드나들면서 부녀회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아 유격대에 보냈다. 이추악이 파견된 지 6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에 300여명이 참가한 4개의 반일조직이 새로 꾸려졌고 16세대 63명이 이주해 서북하구에 근거지를 세워 유격대 활동을 지원했다.

북만주의 별로 남다

1936년 봄 일제와 위만군은 도처에서 주민들의 양식을 약탈했다. 이추악은 한 톨의 곡식도 빼앗길 수 없다면서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폈고, 산나물로 끼니를 때우고 식량을 절약해 항일연군에 보냈다. 통하지구의 반일 기세는 드높아서 목단강지구 경무위원장 나카무라(中村)는 일본 중앙경무위원장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통하지구 치안은 어쩔 수 없는 암증”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1936년 8월27일 배신자 안연수의 밀고로 이추악은 통하현 치안숙정선무공작반에 체포됐다. 체포 뒤 일주일 동안 갖은 고문이 가해졌고 전향서·반성문을 강요했으나 이추악은 “반일하는 데는 죄가 없다. 나에겐 잘못이 없다. 나더러 반일 사상을 포기하라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1936년 9월3일 이추악은 통하현 서문 밖에서 총살됐다. 그녀의 나이 35세. 북만지역 항일투쟁의 빛나는 별 이추악은 민족 해방과 혁명의 길에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던졌다. 총살 후 이추악의 머리는 잘려져 현성에 내걸렸다. 이추악이 총살되기 전 1936년 2월22일 그의 남편 양림도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다.

이추악은 동북지역, 그것도 저 멀리 북만주지역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운 항일투사였다.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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