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김명시 장군과 남동생 김형윤 선생.

올해 1월9일 경남동부보훈지청에 마산 출신 김명시(金命時)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서가 접수됐다. 경남 창원시에 위치한 열린사회희망연대가 그 주인공이다. 이 단체는 오랫동안 그의 형제·자매나 후손(친족)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하자 이순일 공동대표 명의로 신청서를 접수했다.

한 지역신문에 두 달 가까이 ‘김명시 장군 친족찾기운동’ 광고가 실리고, 여러 매체에 기사화되면서 마침내 친족들과 연락이 닿았다. 이들 가운데 김명시의 외사촌 동생 김필두(81·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씨와 사촌동생 김형도(91)씨 등 16명은 지난 8월21일 그의 고향집 터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간담회에서 가족들은 “김명시라는 이름은 저희들 가슴속에서만 담아 왔다”며 “지금이라도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니 감사하고 후손으로서 자랑스럽다”고 소회를 밝혔다. 사후 70년 만에 시민단체와 언론들이 나서서 명예회복과 서훈을 요구하고 있는 김명시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사후 70년 만에 추진되는 명예회복과 서훈

김명시는 1907년 경상남도 마산부 만정(萬町, 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 189번지에서 출생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민족의식이 투철한 어머니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특히 그가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은 마산지역 사회주의운동의 맹주로 불린 오빠 김형선(金炯善)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형선은 1932년 ‘반일 격문’을 인쇄해 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해방 후에야 출소할 수 있었다. 해방 후 김형선은 건국준비위원회 교통부 위원, 민전 중앙위원, 남로당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다 1950년 9월 북으로 올라가던 중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남동생 김형윤(金炯潤)도 1930년대 비밀결사인 ‘마산적색교원회’ 사건 등으로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다.

이들 삼 형제뿐만 아니라 어머니 김인석(金仁石)도 3·1 독립운동에 앞장섰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 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1924년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김명시는 1925년 7월 김형선이 활동하던 고려공산청년회에 들어갔고, 10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모스크바 청년유학생으로 뽑혀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1927년 6월 공산대학을 중퇴하고 상해로 가서 중국공산청년단 상해한인지부에 가입해 조직부 겸 선전부의 책임과 지부 책임직을 맡아 활동했다. 그해 9월에는 상해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해 부인부(婦人部) 책임에 취임했다.

1929년 10월께에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제를 관철하기 위해 홍남표와 함께 길림성 이층전자(二層甸子)로 가서 조선인 당원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어머니와 삼 형제 모두 독립운동 투신

그는 1931년 9월18일 일제가 남만주철도 폭파사건을 조작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제국주의 타도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상해한인반제동맹을 조직하는 등 탁월한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이 사건을 기화로 일제는 결국 괴뢰만주국을 세우고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위한 교두보를 구축하게 된다.

김명시는 이듬해 조선으로 돌아와 지하공작에 뛰어들었다. 1932년 3월 중국공산당 본부의 지령을 받아 서울로 잠입한 다음 인천에 거처를 마련하고 각종 전단을 배포했고 인천지역 여성노동자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발각돼 1932년 5월 신의주에서 체포,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언도받고 1939년 신의주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했다(조선공산당재건사건 주모자들과 공판에 관한 기사. <매일신보> 1933년 11월15일).

1939년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탈출한 김명시는 자신의 항일투쟁 역사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들어가 부녀복무대 지휘관으로 적후 공작을 전개하던 그는 곧 연안으로 들어갔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한 뒤에는 천진과 북경 등 일본 점령지역에 파견돼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종횡무진’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김명시를 비롯한 조선독립동맹 주요 간부들은 해방된 조국 땅에 개인 자격으로 입국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행보는 갈라졌다. 조선의용군 총사령이었던 무정과 박일우·허정숙 등은 평양으로 가서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조선독립동맹 주석이었던 김두봉과 부주석 최창익·한빈 등은 1946년 2월 기존 조직을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했다. 조선신민당 당수가 된 김두봉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됐다.

반면 김명시는 오빠 김형선과 박헌영·홍남표 등 화요계가 활동하고 있는 서울로 왔다. 서울에 들어온 그는 우선 언론을 통해 화북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활약상에 대해 알렸고, 조선부녀총동맹이 결성되자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7년에는 전라도에서 발생한 우익테러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민주여성동맹 대표 자격으로 당시 미군정청장이던 하지 중장에게 항의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중앙신문> <독립신보> 등은 당시 그를 두고 ‘여장군’ ‘백마 탄 여장군’으로 일컬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장군’으로 불린 분들이 적지 않지만 여성에게 ‘장군’ 호칭을 붙인 것은 드문 일이었다. 특히 우익신문이었던 <동아일보>가 ‘조선의 잔 다르크’로까지 치켜세운 것만 보아도 당시 그의 평판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신천지> 1946년 3월호에 실린 ‘팔로군에 종군했던 김명시 여장군의 반생기’를 쓴 이는 당시 서울신문사 기자였던 노천명이었다. 친일행적을 사죄하고 벌을 받아도 시원찮을 친일파가 이런 기사를 썼다는 것은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나, 그만큼 김명시가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조선의 잔 다르크’로 불려

해방 이후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김명시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좌익계 숙청 광풍이 일어났을 때 돌연 행방이 묘연해졌다. 1949년 10월11일 도하 일간지 2면 한 귀퉁이에 “북로당 간부 김명시, 부평서 유치장서 목매 자살”이란 기사가 실렸다. 며칠 후 내무부 장관 김효석은 그가 “자기의 상의를 찢어서 유치장 내 3척 높이의 수도관에 목을 매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 둘.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김명시였다. 일제에 맞서 중국과 조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고, 일경에 체포돼 고문당하고 6년 동안 가혹한 옥살이도 견뎠던 그가 무슨 이유로 자살을 택한 것일까.

모스크바에 유학하고 중국 대륙과 조국 땅에서 여성운동가·조직운동가로서 지하활동·선전활동·무장투쟁 등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항일운동가가 왜 해방된 조국 땅에 돌아와서 철창에 갇혀야 했으며, 스스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을까.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떨어지자 수많은 지사들이 손에 무장을 잡고 일제에 맞서 싸웠다. 그들 중에서 민족주의자도 있었고, 사회주의자도 있었다. 논쟁도 있었고, 싸움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분단된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전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우익의 거두였던 김구도 나라에 분단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자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지 않았는가.

올해로 분단된 지도 74년이 지났고, 전쟁의 참화를 겪은 지도 6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강산이 일곱 번이나 바뀔 시간이 지났어도 아직 이 나라는 낡은 이념의 잣대로 선조들의 귀중한 독립투쟁 역사를 왜곡하거나 후손들의 뇌리에서 지워 버리고 있다.

김명시 동상 건립운동과 명예회복을 추진하고 있는 열린사회희망연대 김영만 상임고문은 이렇게 말한다.

“김명시 장군의 형제들이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에 친족들은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쉬쉬하는 이중적인 생각과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한 집안의 불행이자 민족의 불행이다. 우리 민족사가 제대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반쪽 독립운동사가 돼서는 안 된다. 이번 기회에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해방된 조국의 철창에서 스스로 목숨 끊어

이념은 이념이고,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이다!

▲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김명시 삼 형제는 독립운동가로서의 행적이 뚜렷함에도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아직 국가에서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의 뿌리의 반쪽을 스스로 잘라 내는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의 어머니는 3·1 독립운동에 앞장서다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하는데, 이조차 서훈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비록 때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김명시 장군에 대한 명예회복과 서훈을 위한 활동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수많은 사회주의계열 항일운동가들이 대중들에게 알려졌고, 그들의 삶과 업적도 재조명되고 있다.

보훈당국은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걸맞게 해방 이전의 업적과 독립활동을 기준으로 보훈 규정을 고치고 더 많은 항일운동가들, 특히 여성운동가들을 발굴하고 그 정신과 업적을 널리 후대들에게 알리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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