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김찬 선생(1911~1939년).<공명출판사>

<아리랑>의 김산보다 더 극적인 삶

<아리랑>에서 김산(본명 장지락)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한 조선인 항일혁명가의 삶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혁명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고뇌와 좌절, 죽음을 무릅쓴 투쟁 과정, 그리고 그의 사상편력을 엿볼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김산은 운이 좋았다. 우연찮게 님 웨일스라는 미국인 여기자와 만나 그의 삶과 투쟁이 오롯이 기록돼 전해져 오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인해 역사적 인물로 자리매김됐다. 그러나 항일과 독립을 위해 불꽃같이 살다간 수많은 김산이 있었다. 여기 김산 이상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김찬(金燦)이라는 인물을 소개한다. 김산처럼 젊은 나이에 일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생을 마감한 공통점이 있는 반면에 김산과 달리 조선과 중국을 드나들며 항일혁명활동을 했으며 부부가 같이 한날한시에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이라 할 수 있다.

학생운동 거쳐 항일혁명가로 성장

김찬은 나라를 잃은 1911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아버지 김병순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서울(당시 경성)의 관문으로 인천이 있었던 것처럼 평양에는 진남포가 있었다. 1897년 개항되고 난 후 무역과 상공업이 발달한 신흥공업도시로서 성장한 진남포에는 일찍이 신사상과 신학문을 받아들인 서양식 신식학교가 들어섰다. 김찬은 장로교 선교사가 세운 득신학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는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될 정도로 반일의식이 강했다. 부친은 사업을 잘해 재력가가 됐으며 독립운동에 자금을 댄 관계로 3·1 운동 후 일제로부터 감시인물이 되자 중국으로 이주하기로 결심했다. 김찬이 10세 되던 해인 1921년, 그들이 정착한 곳은 북경에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통주(현재 통현)였다. 1922년 이곳에서 김찬은 역시 기독교계통 학교인 노하중학에 입학해 1928년 고등과를 마치고 졸업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이미 항일운동에 뛰어든 김찬은 졸업을 하고 혁명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상해로 갔다. 그곳에서 조선공산당에 가입하고 조직의 윗선으로 김형선을 만났다. 김형선은 경남 마산 태생으로 당시 조선공산당 내에서 최고 조직활동가로 평가받은 인물로 마산과 부산에서 조직활동을 하다가 1926년 8월 조선공산당 2차 검거사건을 피해 상해로 온 것이다. 김형선의 상부에는 박헌영과 김단야가 있었다. 김찬은 김단야가 이끈 '코뮤니스트' 그룹의 멤버가 됐다.

김찬은 조직적 임무를 부여받고 1931년 혁명적 노동조합활동을 위해 고향인 진남포로 10년 만에 찾아갔다. 그는 노동자 독서회를 조직하고 노동조합활동을 지도하는 등 쉼 없이 활동했다. 옥수수 전분을 만드는 미국계 회사인 콘스탄치사와 남포제련소 등에 취업해 노동자로서 생활하기도 했다. 일제하 노동운동사에서 의미 있는 파업투쟁을 했던 삼성정미소 파업을 주도했으며 그가 씨를 뿌린 남포제련소는 1935년 7월 1천200여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완강하게 벌여 나갔다. 이 투쟁은 30년대 전반기 대표적인 파업투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45일간 일제 고문을 이겨 낸 신념의 강자

김형선·김명시(김형선의 여동생)·고명자(김단야의 처)·김찬 등 코뮤니스트 그룹은 상해에서 김단야가 발간한 잡지와 삐라 등 선전물을 전국으로 배포하기로 했다. 김찬은 평양과 남포는 물론 신의주 등 평북일대에 우편을 통해 배포했다. 일제 경찰이 이를 탐지하고 감시와 추적을 하기 시작했다. 고명자·김명시가 체포되자 김형선과 김찬은 중국으로 탈출했다. 북경을 거쳐 상해로 간 김찬은 김단야·박헌영과 만나고 나서 조선에서 사업을 재개하기로 했다. 1932년 9월 신의주 국경을 넘어 선천군까지 왔으나 심천면 고군영 주재소 앞 도로에서 일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경찰서에서 45일간이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겨 냈다. 그가 초인적 의지로 이렇게 버틴 것은 상부 조직이 검거되지 않도록 시간을 벌고자 한 까닭이었다. 고문으로 인해 민봉근이 죽었으며 김승락은 신의주형무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하는 등 고문은 혹독했다. 그를 취조했던 평북 경찰부는 종래 다수 사상범 중 검거 후 45일까지 자기 범행을 전면 부인한 인물은 김찬 외에 유례가 없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먼저 구속된 고명자·김명시 외에 조봉암·홍남표 등이 붙잡혔는데 이 사건은 조선공산당재건사건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운명의 여인, 여성혁명가 도개손과 결혼

김찬은 1년6월형을 선고받았지만 예심 기간을 합해 2년이 넘게 신의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후 1934년 출소했다. 그는 다시 중국으로 갔다. 김찬은 상해에 가서 김단야를 수소문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김단야는 조선에서 조직이 무너지고 상해에서도 국민당군과 일제의 감시·압박이 심해지자 모스크바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상해에서 김찬은 그의 영원한 동지이자 연인인 도개손(陶凱孫)을 만나 같이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같이 한 사업은 강소성위원회에서 소년진리보(少年眞理報)를 제작 발간하는 일이었다.

김찬과 도개손은 1930년께 북경에서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도개손은 북경대학 지질학과 학생으로 북경대 최초로 이과계에 진학한 여학생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학생 시절 북경대 최초로 남하시위를 주도하며 항일투쟁의 불길을 지피는 등 학생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한 이력을 갖고 있었다. 김찬과 도개손이 만나게 된 계기는 김찬의 조카인 김영애의 소개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영애도 북경대에 다니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는데 도개손과는 친구 사이였다. 도개순은 북경대에서 유명한 존재로 그녀를 흠모하며 구애하는 학생들이 있었으나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조선인 김문철(중국에서 부른 김찬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가족들도 반대했으며 혁명 동료들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를 무릅쓰고 1935년 상해에서 두 사람은 결혼했다.

도개손은 여린 여성이었지만 매우 명민했을 뿐만 아니라 위기상황에 잘 대처했다. 당시 많은 간부들이 체포되거나 변절해 조직이 파괴됐다. 무너진 강소성 공청단성위를 재건하는 데 도개손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소년진리보 역시 도개손이 기획한 사업이었다.

1939년 연안의 비극, 극좌에 희생당한 혁명가 부부

1935년 11월 김찬의 여동생인 김순경이 상해로 찾아왔다. 김순경은 노하중학 동창인 중국인 장문열과 결혼해 부부가 같이 항일혁명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장문열과 김순경은 만주성위원회에서 혁명과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김찬과 도개손은 장문열에게 만주에서 활동할 수 있을지를 타진했다. 1936년 5월 상해에서 힘든 과업을 수행하고 나서 장문열의 후임으로 만주공산당 재건임무를 띄고 하얼빈으로 갔다. 김찬은 중국공산당 하얼빈시위원회 서기, 도개손은 하얼빈시위 선전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일본 관동군과 장개석의 국민당군 특무들은 공산당원에 대한 체포작전을 강화해 나갔다. 도저히 사업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돼 짧은 만주 생활을 마치고 1936년 7월 북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북경도 일본의 공세로 점령돼 안전지대가 되지 않았다.

1937년 8월 그들 부부는 혁명의 성지 연안으로 향했다. 연안에서 김찬은 섬북공학에, 도개손은 공산당중앙당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연안에서는 반혁명분자 숙청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주모자는 사회부장 강생이었다. 강생은 어이없게도 김찬과 도개손을 국제간첩과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았다. 김찬의 죄목은 김순경과 장문열이 일본 간첩임을 알면서도 서로 연락을 취했다는 황당무계한 혐의였다. 그전에 김찬의 여동생인 김순경과 장문열 부부가 모스크바에 불려가 강생에 의해 처형됐다. 도개손에게는 김찬을 부인하고 포기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당당히 죽음을 선택했다. 1939년 3월 연안 안새현 진무동 마가구에서 총살형이 집행됐다. 불꽃처럼 타올랐던 그들의 혁명과 사랑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각기 28세, 27세의 짧은 한생을 마친 김찬과 도개손. 요즘 기준으로 보면 참으로 젊디젊은 나이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혁명과 사랑은 숭고하고 위대했다. 그들의 혁명은 조국과 민중에 대한 사랑의 발로였으며, 그들의 사랑은 서로에 대한 순결한 혁명이었다. 이들 부부의 삶과 투쟁을 조명하는 문학작품과 영화작품이 나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고대해 본다.

▲ 노세극 4·16 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1982년 5월11일 중국공산당 공안부는 김찬과 도개손 부부의 복권을 결정했다. 김찬과 도개손은 아들 연상과 딸 소나를 남겼다. 복권이 되는 데는 아들 김연상의 노력이 컸다.

덧붙이는 글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중 동명이인 김찬이 있다.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본명은 김락준이며 제1차 조선공산당 선전부장을 했다. 그는 해방 후 조봉암과 같이 활동하며 농민일보사 초대사장을 역임했다. 두 사람을 혼동하는 연구자들이 많이 있어 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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