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노총이 제작하는 노동예능 <있긔없긔> 시즌2 첫 촬영이 지난 25일 서울 을지로의 한 선술집에서 진행됐다. 출연자들이 대본 읽기 등 촬영 전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시작할 때 어느 카메라 보고 해야 되나요?”
지난 25일 오후 1시 서울 을지로 인쇄골목 한가운데 조그마한 선술집. 20명 남짓한 사람들과 10대의 카메라, 4개의 조명이 자리하다 보니 발 디딜 틈이 없다.
손문선 아나운서(프리랜서)가 묻자 박경렬 PD(피유미디어)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친다.
“변호사님은 여기 보시고, 진행하시는 두 분은 이쪽 카메라 보세요.”
“슬레이트 준비할게요!”
“하나! 둘! 시작!”
잠시 정적이 흐르고 모두들 숨을 죽인다. 박경렬 PD가 손을 높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퇴사하기 있긔없긔> 시즌 2 첫 오프닝입니다. ”
한국노총 유튜브 채널과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제공하는 ‘노동예능’ 방송프로그램 <퇴사하기 있긔없긔> 시즌2 첫 번째 촬영 현장 풍경이다.

들어는 봤니? 한국노총이 만든 노동예능 프로그램

한국노총의 홍보 콘텐츠가 진화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고무장갑 복면을 뒤집어 쓴 래퍼 마미손의 <소년점프>를 패러디한 뮤직비디오 홍보영상 <노동점프>를 2018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처음 선보였다. 올해 초 유튜브에서 <노동점프> 영상이 공개된 후 10개월 동안 2천700명이 한국노총 채널 구독자가 됐다. 그 힘을 바탕으로 4월부터 6월까지 <회사에서 이러기 있긔없긔> 시즌 1과 버스노동자 장시간 노동 문제를 짚은 <전지적 버스시점> <한국노총×닷페이스 ‘나는 요양보호사입니다’>가 줄줄이 만들어졌다. 뮤직비디오와 다큐멘터리를 넘어 예능프로그램까지 한계가 없어 보인다.

<퇴사하기 있긔없긔> 시즌 2 연출을 맡은 박경렬 PD는 예능전문 PD다. 이달부터 매주 1회씩 모두 10편의 <퇴사하기 있긔없긔> 시즌 2를 만들기 위해서 특별한 제작팀을 만들었다.

손문선 아나운서가 진행하고 한국노총 중앙법률원의 지하림 변호사와 61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 신흥재씨가 고정출연한다. 신흥재씨는 지금은 종영한 SBS 개그프로그램 <웃찾사>에서 '문과이과' 코너에 출연한 개그맨이다.

촬영을 술집에서 하는 이유는 프로그램이 '직장인의 고민상담소'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렇게 일하는 게 맞는 걸까. 그냥 확 퇴사할까' 처럼 직장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렸을 고민을 MC를 비롯해 고정출연자 3명이 술 한잔하면서 풀어 보자는 취지다. 매주 새로운 고민 사연과 함께 한국노총 조합원들이 초대손님으로 출연한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조합원들이 출연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고충, 위법과 편법을 오가는 부조리한 노동환경을 털어 놓는다. 고정출연자들은 이들의 사연에 공감하고 위로하며 때로는 제도적이고 실질적인 해결방안을 전달한다. 토크쇼는 사연의 주인공들에게 맞는 야식을 찾아 전달하면서 끝이 난다. 이를테면 "위에서 치이고 아래에서 치이고…. 샌드위치 인생이라 힘들다"고 말하는 초대손님에게는 '계란 듬뿍, 치즈 듬뿍 3단 샌드위치'를 내주는 식이다. 먹방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힐링하며 돌아간다는 게 프로그램의 전체 설정이다.

청년 미조직 노동자 눈높이 맞춘 새로운 실험
노동과 재미 사이 쉽지 않은 줄타기


촬영 현장은 ‘예능프로그램’답게 쉬지 않고 웃음소리가 났다.
“아 여기 우리 술집 메뉴가 있어요.”
신흥재씨가 메뉴판을 들고 하나하나 읽는다.
“라떼는 말이야. 그렇죠. 부장님들이 좋아하시는 메뉴죠. 나 때는 말이야~ 하하하. 야근각 김부각, 야근할 때 먹으면 좋겠네요. 날로 먹는 회사시미, 넵넵 한 병. 넵넵 한 병이 뭐죠?”
“넵넵 일병 아닐까요. 신입사원들은 네! 네! 대답하는 게 일이니까 넵넵 일병.”
지하림 변호사가 오늘 처음 방송촬영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 간다.
“왜 이건 안 읽어요? 달걀 십알”
손문선 아나운서가 정확한 발음으로 ‘십알’을 힘줘 읽으니 촬영현장은 다시 웃음바다가 됐다.
박경렬 PD가 잠깐 촬영을 멈춘다. “좋아요. 여기서 본 코너 들어가죠.”
오늘의 초대손님이 등장할 차례다.
보조연출자가 건네준 초록색 봉투를 손 아나운서가 꺼내 읽는다.
“오늘의 사연, 돈이 너무 많아서 쉴 수가 없어요. 힌트는 500억원 그리고 체력왕.”
신흥재씨가 재빨리 끼어든다.
“돈이 많아서 쉴 수가 없다, 건물주인가? 건물주는 잘 쉴 것 같고…. 아! 운동선수? 500억원 정도 선수면 ‘손흥민’ ‘류현진’급인데 한국노총에서 섭외 가능한가요? 류현진 선수 오면 완전 대박인데.”
그때 등장한 초대손님은 브링스코리아노조 조합원인 현금수송원 이진식·박인수씨다. 아침에 별 보고 출근해 저녁에 달 보고 퇴근할 정도로 장시간 일하지만 임금은 최저임금 수준이라는 사연을 털어 놓는다. 현금수송차 종류는 뭐냐, 한 번에 얼마까지 실어 봤냐, 혹시 탈취사고는 없었냐는 이야기를 나눌 때까지 활기를 띠었던 대화가 근로시간 특례업종·시간외수당·최저임금·근골격계질환 같은 주제로 옮겨 오자 뚝뚝 끊기기 시작한다.

심각한 노동현장의 현실을 재미와 웃음을 추구하는 예능프로그램에 녹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노동과 웃음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는 것이 한국노총식 노동예능 방송의 키포인트다. 한국노총이 영상 제작을 외부에 맡긴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퇴사하기 있긔없긔> 시즌2 사업을 맡고 있는 황희경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 차장은 “프로그램 타깃층은 취업준비생·청년노동자”라며 “한국노총을 모르는 사람에게 노동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쉽고 재미있게 풀어 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유튜브식 언어로 시작하는 한국노총 청년 조직사업

<퇴사하기 있긔없긔> 시즌 2의 편당 제작비는 여타 인터넷방송 예능프로그램 제작비와 비교하면 절반도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한국노총 처지에서는 적지 않은 액수다. 한국노총이 이렇게 공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훈중 교육선전본부장은 “청년세대와 함께 노동문제를 고민하기 위한 한국노총의 노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청년세대와 소통하려면 어떤 플랫폼이 필요한지 고민했을 때 유튜브와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이 가장 접근하기 쉽겠다고 판단했다”며 “노동문제에 공감을 확산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의 한국노총 선전영상이 조합원 교육에 방점을 찍고 가르치려 했다면 노동문제에 공감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프레임 자체를 바꿨다. 먼저 청년세대가 노동문제에 공감해야 노동의 존엄성을 알고, 노동존중 사회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퇴사하기 있긔없긔> 시즌 2는 다음달 초 한국노총 공식 유튜브채널(youtube.com/user/inochong)과 SNS를 통해 만나 볼 수 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