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정 기자

대만의 한 건설현장 작업안전관리자였던 스물아홉 살 칭페이펑씨. 현장에서 하청업체들이 작업안전지침을 지키지 않자, 이를 회사에 알렸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냥 당신이 일을 그만두라"였다. 업무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받은 그는 정신질환을 겪게 됐고, 2012년 10월 결혼식을 1주일 앞두고 25미터 높이 건물에서 몸을 던졌다.

온라인 강의업체 에스티유니타스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지난해 1월 목숨을 끊은 웹디자이너 장민순씨. 2015년 5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장씨가 근무한 32개월 중 12시간 이상 연장근로를 한 주가 46주나 됐다. 하루 12시간을 일한 날도 전체 출근일의 17.9%였다. 직장상사의 괴롭힘도 있었다. 그는 가족들에게 "내가 야근 관행을 바꾸겠다"고 말한 뒤 열흘이 지난 지난해 1월3일 주검으로 발견됐다.

사회문제 된 과로사·과로자살
"국가 차원 대책마련 시급"


대만과 한국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을 등지거나 질병으로 죽는 이른바 '과로죽음'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다. 칭페이펑씨는 대만에서 과로자살을 인정받은 첫 케이스가 됐고, 장씨도 최근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아시아직업및환경피해자권리네트워크(ANROEV) 주최로 29일 오전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17회 아시아직업환경피해자대회 둘째 날 '과로사·과로자살' 세션에서는 과로죽음을 막기 위해 과로사방지법을 제정한 일본처럼 국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대만 안전보건단체 직업환경건강(OSH) LINK 활동가 황이링씨는 "과로사와 관련한 정부의 첫 가이드라인은 1991년에 나왔지만 2006년에야 첫 과로사 인정 사례가 나왔다며 "근무지에서 죽어야 과로사로 인정한다는 기준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2010년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엔지니어가 자택에서 죽은 사건이 공론화하면서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개정하긴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증거 불충분으로 과로사·과로자살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황씨는 "2009년 새로 개정된 가이드라인에서는 직장내 괴롭힘으로 인한 정신질환도 산재로 규정했지만, 현재까지 공식 산재로 인정된 건 28건에 불과하다"며 "입증이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가족들에게 과로사·과로자살 입증 책임을 돌리고 있는 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 과로사·과로자살 유가족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 배고은씨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는 과로사·과로자살에 대한 객관적 인정기준이 존재하지 않아 산재로 승인받기가 어렵다"며 "과로죽음에 대한 모든 입증책임은 유가족이 떠안기 때문에 겁을 먹고 쉽사리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한국에서 과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은 노동시간을 줄이는 정도"라며 "노동강도나 직장내 부당한 인격모독·괴롭힘 역시 과로 문제로 보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2014년 과로사방지법 제정한 일본
사회적 합의조차 도출 못한 한국


일본은 2014년 과로사방지법을 제정해 과로사 등에 대한 조사·연구와 장시간 노동 단축을 위한 대국민 홍보, 상담체계 설비, 과로예방 목적 민간 단체 지원을 하고 있다. 키타테 시게루 일본 과로사방지오사카센터 사무국장은 "2014년 제정된 일본의 과로사방지법은 시민운동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역노조에서 활동하면서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시키는 등 위법을 저지른 회사와 교섭을 하거나 이슈화해 사회문제화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두더지 잡기 하듯 개별기업 문제를 제기해서는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과로사방지법 제정운동에 나서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유족·언론·시민단체의 힘으로 52만명의 서명을 받자 국회가 움직였다. 결국 일본 국회는 정당·정파를 막론하고 만장일치로 과로사방지법을 통과시켰다.

국내에서도 '과로사방지법'을 만들자는 여론이 일면서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올해 2월까지 과로사방지법 제정을 위한 사회적 논의를 했지만, 법 제정에 부정적인 재계와 정부 반대로 합의문 작성 단계에서 결렬됐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일본의 과로사방지법은 과로사·과로자살에 관한 연구조사를 하고 백서를 발간하는 등 예방교육면에서는 의미가 적지 않다"면서도 "과로죽음의 원인인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한 근본 해결 방법은 아니라는 게 일본 내 평가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최 실장은 "한국에서 과로사방지법을 논의할 때는 반드시 실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각 부처의 개선대책까지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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