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운수노조 소속 도시가스 검침노동자들이 31일 서울시청 앞에서 서울시와 도시가스 공급사에 방문노동자 안전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서울에서 도시가스 검침업무를 하는 A씨는 지난 21일 고객집을 방문했다가 봉변을 당했다. 남성 고객이 검침하는 그의 뒤에 다가와 팔과 허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으며 성추행을 했다. 고객은 음담패설을 쏟아 내고 횡설수설하며 A씨에게 계속 접근했다. 놀란 A씨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통화 모습을 본 뒤에야 남성은 치근덕거리기를 멈췄다. A씨는 가까스로 그 집을 벗어날 수 있었다. 같은날 밤 A씨는 호흡곤란이 와 응급실을 찾아야 했다. 스트레스성 과호흡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현재 그는 녹색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 통원 진료를 받고 있다.

알몸 보이고, 뒤에서 껴안고, 감금·폭행하고
"이런 일 한두 번이 아니다"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는 31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시와 도시가스 공급사는 도시가스 방문노동자에 대한 안전대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지부는 “A씨가 겪은 일이 특별하지 않다”고 했다. 검침원들이 폭언·성폭력·괴롭힘 등에 상시로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서울도시가스 검침원 김윤숙씨가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는 "점검 방문을 했는데 고객이 알몸으로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왔고 너무 놀라 몸이 굳어 버렸다"며 "계량기 확인을 위해 방문했던 한 곳에서는 집주인이 '우리 집은 계량기가 없다'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며 "지금도 사건을 겪었던 집 근처를 지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토로했다.

지난 5월 울산에서는 업무 중 감금·추행을 당한 한 검침원이 극단적 시도를 했다. 이에 분노한 동료들은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4개월이 넘는 파업을 했다.

검침원이 겪는 성폭력·괴롭힘·폭언·폭행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변태나 몰상식한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다"고 설명했다. 몽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는 "고객센터가 목표 할당량을 책정해 미달하면 임금·인사상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 위험에 노출돼도 방문 업무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며 "고객과 갈등이나 불상사가 발생해도 1년에 두 번 점검을 해야 하니 방문을 거부당할까 봐 사건을 대충 넘기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지부에 따르면 서울지역 검침노동자 한 명이 담당하는 세대는 3천~4천500세대다. 대부분 고객센터는 점검률 97%를 노동자에게 할당한다.

김지안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맞벌이와 1인 가구 증가로 제때 검침업무를 할 수 없는 세대가 늘었다"며 "점검률을 달성하기 위해 검침노동자들은 피해를 감수하는 등 고객과 불화를 피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맞벌이·1인 가구 증가로 제때 검침 어려워져
한 가구라도 더 완료하려 '피해 감수'


지부는 2인1조 근무와 점검실적 요구 폐지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시민들의 가스안전과 도시가스 방문노동자의 노동안전 둘 다를 지키기 위한 근본적 방안은 인원충원을 통한 2인 1조 근무 도입"이라며 "서울시와 도시가스 공급사는 점검완료 실적 요구를 폐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서울시 도시가스는 코원에너지서비스·예스코·서울도시가스·귀뚜라미에너지·삼천리·대륜E&S 등 6개 민간업체가 공급한다. 서울시는 가스공급을 받으면서 이들 업체에 가스검침·점검 사업권을 준다. 6개 업체는 검침업무 등을 각 지역 가스안전점검 고객센터에 다시 위탁한다. 서울지역 고객센터는 70곳가량이다. 검침원들은 고객센터에 속한 노동자다. 6개 업체가 고객센터에 지급하는 수수료는 서울시가 정한다. 서울시가 검침원 노동조건을 사실상 결정하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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