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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일

기사승인 2019.11.04  08: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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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훈 기자
언젠가 대학교 학생회관 복도에 페인트와 시너 냄새가 진동했다. 낡은 소파 양쪽으로 청테이프 착착 붙어 흰 천이 팽팽하게 걸렸다. 붓과 페인트 통 든 사람이 일필휘지, 빈자리를 거침없이 채워 갔다. 넘쳐흐르지도, 부족해 흐릿하지도 않아 선이 매끈했다. 장인의 솜씨였다. ○○체로도 불렸다. 한때의 구호가 생생하게 거기 담겼다. 늦은 밤, 채 마르지 않은 현수막을 거느라 사람들은 나무를 탔다. 선이 삐뚤지 않은지 확인하려고 보통 3인1조로 움직였다. 어느덧 옛날얘기다. 요즘엔 돈 주고 맡긴다. 국회 앞에서 농성하는 사람들이 큰 천에 구호를 새기고 있다. 낯선 풍경이다. 선을 넘어 번진 물감을 지우느라 손길이 분주하다. 반듯한 선은 매끈한 결과물을 향한 지침 역할을 하지만, 굴레가 되기도 한다. 만다라 도안에 색칠 놀이하던 아이에게 선을 넘어간 부분을 지적했더니, 왜 꼭 그래야만 하느냐고 항의하듯 내게 물었다.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 너만의 방식으로 해 보라고 하고 말았다. 하지만 안전과 관련된 것이면 타협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자동차 안전벨트와 횡단보도 정지선과 지하철역 노란색 안전선 같은 걸 꼭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느라 아이 뒤따르며 입이 마른다. 가을볕에 금세 마른 저 걸개그림은 그 앞 노동법 개악 중단을 요구하던 집회 한쪽에 걸렸다. 전태일 그림 위에 새긴 구호가 멀리서 보기에 반듯했다. 더 큰 집회를 예고했다. 무대 오른 사람은 잡혀 갈 것을 각오하고 저 선을 넘자고 선동했다. 걸개그림 그리던 옆자리에선 열차가 운행 중인 선로 위에서 일하다가 죽고 다친 노동자를 추모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안전선은 노동자 일터에서 자주 흐릿했다. 관대했다. 주의 부족, 인력 부족 때문이라고 하는데 실은 그게 돈 때문이란 걸 사람들은 안다. 오늘 저들은 더 이상 죽이지 말라는 구호를 새겨 외친다. 옛날얘기로 그쳤어야 할 말들이 여태 살아 숨 쉰다.

정기훈 photo@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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