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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주년 연중기획-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41] 1930년대 동북 항일무장투쟁 초기 ‘유관순들’

기사승인 2019.12.09  08: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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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김순희 열사(1910~1932)

우리는 어릴 적부터 ‘유관순 누나’를 많이 듣고 배웠다. 이화학당 고등부(현재 이화여고) 1학년생으로 서울 3·1 운동에 참여하고 고향 충남 천안으로 확산하다가 체포·구속돼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유관순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 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어림잡아 7천500명이다. 사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자들 중에는 유관순보다 더 헌신적으로 투쟁하다가 더 장렬하게 희생된 열사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 국내에서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유관순들은 많았다. 그분들 중에서 1930년대 동북지역 항일무장투쟁 초기의 한 여성 열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빈농 출신으로 소년선봉대 활동을 거쳐 소학교 교원, 부녀회 책임자, 농민적위대 대원, 공산당 당원으로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일제의 고문과 화형으로 희생된 김순희 열사다.

야학에서 독립정신 배우고

김순희 열사는 조선이 일본에 병탄되던 1910년 민족의 영산 백두산 아래 안도현 소사하 빈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야학으로 글과 노래를 익히고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배우며 점차 식민지 망국노의 처지와 민족해방투쟁의 절박성을 깨달았다. 일찍이 동만주 지역에는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으로서 용정의 서전서숙부터 명동학교·동흥중학·대성중학·은진중학 등 수많은 민족학교가 개설돼 애국계몽과 독립운동가 배출에 심혈을 기울였고 남만주·북만주보다도 빠르게 1920년대 중반 민족주의가 퇴조하고 사회주의가 확산됐다.

당시 동만주 일대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영향력이 크게 미쳤다. 그런데 화요파·ML파·서울상해파 등 당내 분파들이 만주에서까지 서로 갈등 대립했고 민중 속에 들어가 민중의 힘을 결집하기보다 국제당의 방침을 교조주의적 자세로 맹종했다. 그 결과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1928년 말 조선공산당 해체 이후 1국1당 원칙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기 위한 실적 쌓기 차원에서 좌경 맹동의 무모한 5·30 간도농민폭동을 일으켜 불필요한 많은 희생과 피해를 자초하고 일제의 조선-중국 이간책에 악용되기도 했다.

김순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혁명가로 성장했다. 소년선봉대 활동을 거쳐 1930년 21세 때는 화룡의 농민적위대에 참가하고 그 후 중국공산당에도 가입하게 됐다. 5·30 간도농민폭동의 여파로 잠시 피해 있던 김순희는 1931년 2월과 3월 두 차례 비밀리에 중국 화룡현(현 화룡시) 투도진에서 20리가량 떨어진 골 안의 약수동 항일근거지에 왔다. 김순희가 농민들을 이끌고 항일혁명투쟁을 벌이다가 귀중한 생명을 바친 곳이다.

소년선봉대 거쳐 농민적위대 활동

중국공산당 평강구위원회가 김순희를 약수동학교 교원으로 배치하고 주로 부녀사업을 책임지게 했다. 그녀는 지역 농민들을 발동해 학교를 꾸리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야학을 열어 마을 사람들에게 지주-소작농의 관계, 조선·중국 인민들의 공통된 식민지·반식민지 처지와 단결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해 4월 김순희는 약수동 군중들 앞에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냈다. 약수동 적위대 부대장인 손태익과 결혼하고 적위대 대원 겸 부녀구국회 주임을 맡아 활동했다.

약수동에 대한 적들의 토벌이 가중되자 적위대와 그 대장인 남편도 산으로 들어갔다. 김순희는 마을에 남아 농민들을 이끌고 악질지주를 대상으로 소작쟁의를 벌이는 한편, 적위대에 식량·의복 등을 제때에 공급하는 사업을 맹렬히 추진했다. 특히 일찍 자신의 경험을 살려 소년선봉대를 조직해 척후사업을 기막히게 수행했다. 적을 타격할 수 있는 각종 수단과 방법을 전수해 소년선봉대 대원들이 토벌대의 동태를 파악하고 전봇대 위의 전선을 절단하고 비밀 쪽지나 선전물을 숨겨 전달하게 했다.

추수투쟁에 뛰어들다

1931년 가을, 김순희는 동만주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추수투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약수동 혁명조직에서는 그동안 악질적으로 착취·수탈해 온 지주에게 그해 소작료를 한 알도 바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김순희는 농민들을 찾아다니며 “우리가 피땀 흘려 지은 양식을 지주에게 줘서는 안 된다. 저장했다가 일부는 적위대에 보내고 일부는 농민들의 식량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거듭 선전했다.

이미 갖다 바친 소작료도 도로 찾아오고 소작료를 받으러 온 지주가 약수동에서 쫓겨 가는 등 농민들의 기세는 아주 대단했다. 이런 분위기가 되자 화룡현 두도구의 일본영사 분관과 경찰서에서는 1932년 음력 10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연속 세 차례의 대토벌을 감행했다. 음력 11월4일 이른 새벽 200여명의 일본수비대·경찰·자위단이 갑자기 약수동을 삼면으로 포위해 들어왔다. 어둠을 타고 세린하쪽으로 돌아 기어들었기 때문에 마을에서 몇 리 떨어져 있는 '도끼지광'(진화)의 첫 보초선에서 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두 번째 보초선인 마을 부근 조개산 보초선에서 적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당 조직에서는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간부·유격대원·적위대원과 소년선봉대 대원들을 즉시 피신시켰다. 하지만 김순희는 대오가 떠난 뒤의 식량 처리를 걱정한 데다가 만삭이 된 자기가 따라가면 대오의 안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 기어이 마을에 남았다. 토벌대는 주구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수색하면서 10여 채의 집과 학교에 불을 질렀다. 온 마을이 연기와 불길로 뒤덮였다. 집안에서 이런 참상을 내다보던 김순희는 일제 놈들의 구둣발 소리가 들려오자 갑자기 물동이를 팔에 끼고 나섰는데, 왜놈들이 부엌문을 벌컥 열고 우르르 들어와 그녀의 가슴에 총창을 들이댔다.

자신보다 혁명대오의 안전을 소중히

“어디로 가?”
“물 길러 가요”
“잔말 말고 따라와!”
김순희는 태연히 문을 나섰다. 토벌대가 마당에서 김순희를 심문했다.
“네년이 김순희지?”
“그렇다!”
“빨갱이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
“모른다!”
“네 서방은 어디로 갔느냐?”
“모른다!”
“식량은 어디다 감췄느냐?”
“모른다!”
그러자 놈들은 다짜고짜 뭇매를 안겼다. 그래도 모른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으니 모난 참대젓가락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마구 비틀었다. 김순희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악형을 들이대다가 나중에는 정태준 노인의 마당으로 끌고 갔다. 거기에는 보초를 섰거나 아파 피신하지 못한 적위대 부대장 정태경·리덕길, 소년선봉대 대장 김득봉 등도 붙잡혀 끌려와 있었다. 김순희는 더욱 견결하게 적들과 맞섰다. 놈들은 총검으로 김순희의 배를 쿡쿡 찌르면서 빈정거렸다.

“이년아, 배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몰라서 묻느냐? 잘나면 네놈들을 잡을 영웅이구 못나면 대문거리를 쏘다니는 너희들 같은 놈일 거다!”
악에 받친 놈들은 더욱 미쳐 날뛰었다.
“빨갱이년! 공산군 어디 갔어?”
“기다려라. 이제 곧 네놈들을 잡으러 올거다!”
야수 같은 놈들은 만삭이 된 김순희의 배 위에 널빤지를 올려놓고 양 끝을 내리눌렀다. 김순희는 까무러쳤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곤 했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자 주전자로 고춧가루 물을 입에 쏟아 넣었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배 속의 새 생명이 꿈틀거렸다.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마저 야수 같은 일제 놈들에게 빼앗기게 됐다.

고문과 화형에도 굳은 절개 지켜

“이년, 말하지 않을 테냐? 네 혓바닥이 견디나 이 피대가 견디나 어디 한번 보자!”

가죽 채찍이 연속 김순희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김순희는 악 소리치면서 입을 악물었다. 혹시 정신이 혼미해진 사이에 비밀을 누설할까 싶어 이로 혀를 끊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붉은 피를 놈들의 상판대기에 내뿜었다. 굳은 혁명 절개를 굽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놈들은 김순희를 널판자에 동여매 그녀의 백부인 정태준 노인의 집안에 처넣었다. 반죽음이 된 정태준 노인과 피투성이가 된 김득봉·정태경·리덕길·황익두 등 여러 동지들을 같이 집어던진 후 기총소사하고 집에 불을 질렀다.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이와 같이 죽는 순간까지도 혁명의 비밀을 사수하기 위해 굽힘 없이 싸운 항일 여성영웅 김순희는 불길 속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그의 나이 겨우 22세 때였다. 현재 화룡 약수동에는 항일영웅 김순희 열사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연길의 조선혁명박물관, 통화 정우공원의 동북항일연군기념관 등에는 대표적인 항일빨치산 조선 여성열사들인 최희숙·이계순, 항일팔녀투강의 안순복·이봉선과 함께 약수동 근거지의 전설 김순희 열사의 사진이 정중히 모셔져 있다. 조중 인민 모두의 애족애국애민 교육을 위해.

정성희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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