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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 소리

기사승인 2019.12.23  08: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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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훈 기자>

 

백억, 그거 얼마 안 되더란다. 가늠하기도 어려운 돈이었는데, 택배 상자며 감귤 상자 몇 개면 담기에 충분했다. 한 다발이 오백이었으니, 박카스 상자 그 작은 것엔 1억이 딱 든다고 했다.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건지 보고 싶었다며 백억원어치의 모형 돈을 뽑았다. 보기에 평소 만들던 차 트렁크에 싣고도 한참 남을 만큼이었다. 차떼기며 사과박스는 옛날 말. 온갖 검은돈은 한결 가볍게 오갈 것이라고 모형 돈 백억원어치를 길에 쌓던 이가 말했다. 백억, 그러나 눈앞에 닥친 그 돈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숫자였다. 억 소리 나는 그놈의 돈 때문에, 악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곡소리가 평택 자동차공장 주변에서 오래도록 구성졌다. 서른, 서러운 이름이 복직명단 아닌 장례식장 알림판에 떴다. 빼곡했다. 닳고 닳은 노조 조끼엔 향내가 짙게 배었다. 어느덧 10년 전 일인데, 사람들은 지금 대법원 앞을 찾아 억울함을 호소한다. 가압류당해 반 토막 난 월급 얘기를 푼다. 백억, 억 소리도 못 낼 돈 앞에 무기력했단다. 백약이 무효였다. 극단적 선택에 내몰렸다고 억하심정을 전한다. 억만금을 준대도 양보할 수 없는 생때같은 자식 생각하며 하루 더 버틴다. 정의의 여신이 치켜든 저울은 백억원어치 모형 돈 쪽으로 잔뜩 기울었다. 반대편엔 작업복이 주렁주렁 걸렸다. 흰 국화 한 송이가 접시 위에 올랐다. 상징의식을 지켜보던 노동자가 자주 눈을 감았다. 담아도 담아도 줄지를 않는다고 작업복 입고 쭈그려 앉아 뒷정리하던 사람이 투덜거렸다. 두어 다발 집에 가져가고 싶다고 누군가 실없는 농담을 했는데, 잔뜩 심각했던 옆자리 동료가 그 말에 웃었다. 여기 호소하고 저기서 버텨 봐도 줄지를 않는 손해배상 청구액은 이자 붙어 나날이 커져만 간다. 서슬 시퍼렇다. 언제 또 써먹을까 싶어 차곡차곡, 진짜 돈의 무게를 가늠한 사람들이 모형 돈을 쓸어 담는다.

정기훈 photo@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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