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11월5일 ‘간접고용 노동자 노동인권 증진을 위한 제도개선 권고’를 발표했다.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도급 금지 유해·위험 작업 범위 확대 △위장도급 근절 △사내하청 노동자 노동 3권 보장을 위한 제도개선을 하라고 권고했다. 노동부는 20일까지 답변을 내놓아야 하지만 아직 뚜렷한 움직임이 없다. 노동·시민·사회단체가 노동부에 권고 이행을 촉구하는 글을 보내왔다. 6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 진환 금속노조 한국지엠창원비정규직지회 조합원


“입사 다음해 태어난 첫아들이 군대 첫 휴가를 나오는 다음달, 아들딸에게 이제껏 말 못했던 해고 사정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아빠가 일을 못해서 해고된 게 아니고, 힘이 약해서 해고되긴 했지만 끝까지 애쓸 테니 믿어 달라 말해야겠다.”

지난해 12월31일 한국지엠 창원공장 앞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서 마이크를 잡은 조합원이 한 얘기다. 길게는 27년간 창원공장 설립 즈음부터 일해 온 비정규 노동자들. 법률적 고용형태는 협력업체 간접고용 노동자들이지만 창원공장을 평생 일터로 삼아 왔다. 정규직과 같이 일하며 뼈가 삭는 노동을 견뎌 가며 창원공장을 일궈 왔지만, ‘비정규직’이라는 이름 때문에 회사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새해 585명이 ‘해고자’ ‘실업자’라는 이름을 달게 됐다.

한국지엠은 불법파견 사업장이다. 2005년 고용노동부의 불법파견 시정명령이 떨어진 지 15년째에 접어들고 있다.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할 노동자들을 ‘비정규직, 협력업체·하청 노동자’라는 딱지를 붙여 불법적으로 일을 시켰다. 대법원에선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불법파견 판결을 내렸고 정규직 전환을 명령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지엠은 대법원 판결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한국지엠 법률대리인인 김앤장을 통해 정규직 근로자로 인정하라는 비정규직의 민사소송에 시간 끌기로 대응할 뿐이다. 시간은 그렇게 계속 흘러가고, 그러는 동안에 비정규 노동자들은 공장 밖으로 쫓겨나고 있다.

한 달 전인 지난해 12월 창원공장 비정규직 585명에게 해고통보를 한 뒤 한국지엠은 근속에 따라 1천만원에서 3천만원의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취하하거나 이후 하지 않겠다고 확약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삼았다. 한국지엠 스스로 불법파견을 인정한 것 아니고 무엇인가? 하지만 한국지엠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직접고용하지 않고, 비정규직을 해고해서 불법파견 문제를 벗어나려 한다. 불법을 저지른 한국지엠이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노동자를 해고시키면서, 범죄의 흔적을 지우는 데 동의하면 위로금을 주겠다는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이는 것에 많은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불법파견 의혹이 제기된 뒤 15년 동안 비정규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고 정당한 요구를 해 왔다. 진짜 사장인 한국지엠에 교섭을 요청했다. 한국지엠은 매번 ‘하청노동자’와는 관계없다며 발뺌하며 교섭을 거부해 왔다. 교섭을 거부해 쟁의조정을 신청하면, 노동위원회에서는 원청을 상대로 한 쟁의조정 신청을 각하했다. 대법원에선 실제 사용자라고 인정했음에도 노동위는 이를 부정한 것이다. 비정규직의 노동조건은 원청인 한국지엠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데, 실제 사용자에게 노동 3권인 단체교섭권도·단체행동권도 행사하지 못한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이 비정규직에겐 적용되지 않는 종잇조각일 뿐이다. 원청의 단체교섭 의무를 규정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조 개정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지난해 11월 국가인권위원회가 ‘간접고용 노동자 노동인권 증진을 위한 제도개선 권고’를 발표했다. 권고에 따라 노동부 장관은 90일 이내에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아직 답변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 기간 동안 비정규 노동자들은 해고되고 있다. 노동자들에게 그 90일은 삶이 송두리째 뽑히는 시간이었다. 기업들은 시간을 끌고 불법파견 범죄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비정규직을 해고한다. 정당한 요구를 한 죄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쫓겨난 상실감을 느끼고, 생계의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과연 이 사회에 정의는 있는 것인가? 불법파견 15년은 이 사회가 가진 자들의 뒤집어진 정의로 가득 차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결국 우리 노동자들이 나설 수밖에 없다. 당장 우리는 힘이 부족해서 해고됐지만,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범죄를 은폐하려는 한국지엠에 맞서 우리는 외친다. “이대로 못 나가!”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