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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는 자리에서 봉준호 감독이 “가장 개인적인 게 가장 창조적”이라는 문구로 격찬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만든 영화 <아이리시맨>은 미국 노동운동가 지미 호파(Jimmy Hoffa)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1913년 인디애나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호파는 7살에 아버지를 폐암으로 잃었다. 열네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한 호파는 10대 후반 첫 파업을 조직했다. 1930년대와 40년대에는 노동운동가로 성장했고, 마침내 1957년 10월 전미트럭운전사노조(International Brotherhood of Teamsters, 직역하면 국제운전사형제단으로 이하 팀스터즈)의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팀스터즈라는 이름은 짝을 이뤄 마차를 몰던 마부들을 일컬었는데, 20세기 초반 마차가 트럭으로 대체되면서 트럭운전사를 일컫는 말이 됐다. 화물운송업의 발전 덕분에 조합원이 급증한 팀스터즈는 미국 최대 노조로 성장했다. 조직범죄(organised crime)가 노동조합으로 침투해 연계를 맺은 시기도 팀스터즈가 성장을 거듭하던 때와 겹친다. 하지만 조직범죄와 연루된 부패에 대한 노동운동 내부의 비판이 거세지면서, 팀스터즈는 1957년 미국노총에서 축출당한다. 조직범죄와 조직노동의 중요한 연결고리는 천문학적 액수의 조합원 연기금이었다. 팀스터즈가 운용한 조합원 연금은 마피아를 통해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같은 범죄세계로 흘러갔다. 물론 마피아의 뒷배 역할을 하는 정치인이나 노조를 지지하는 정치권의 선거자금으로도 사용됐다.

조합원 230만명을 거느리면서 1960년대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노조로 성장한 팀스터즈의 돈과 권력을 등에 업은 호파는 일찍부터 조직범죄집단과 관계를 맺었다. 1960년대 미국 정치를 주름잡던 케네디 형제와 각을 세웠던 호파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1963년 11월)에 환호했다. 형에 의해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동생 로버트 케네디는 호파를 집중적으로 추적했다. 호파는 1964년 3월 테네시 주의 채터누가 재판에서 배심원 뇌물 시도 혐의로 징역 8년의 유죄를 선고받은 데 이어, 그해 7월 시카고의 두 번째 재판에서도 연기금의 부적절한 사용에 대한 공모와 사기 혐의로 징역 5년의 유죄 선고를 받았다. 결국 호파는 1967년 3월 펜실베이니아의 감옥에 수감됐다.

수감된 호파를 대신해 위원장 직무대행에 임명된 프랭크 피치몬스는 호파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 했다. 전미자동차노조(UAW) 위원장 월터 루서와 함께 미국노총(AFL-CIO)에 대항하는 새로운 노총인 노동행동동맹(Alliance for Labor Action, ALC)을 출범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미국노총을 좀 더 왼쪽으로 움직이려 노력했던 자동차노조는 1968년 7월 미국노총을 탈퇴했다. ‘좌우합작’으로 탄생한 새 노총(ALC)은 베트남전쟁에 반대하고 보편적 의료보장을 추진했으며 흑인노동자를 비롯한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 사업에 열중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70년 5월 자동차노조 위원장 루서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면서 결정타를 맞은 ALC는 1972년 1월 공식 해산됐다.

ALC가 마지막 숨을 몰아 쉬던 1971년 6월 감옥에 있던 호파는 팀스터즈 위원장직을 사임했고, 그해 7월 위원장선거에서 피치몬스가 위원장에 당선됐다. 1972년 말 재선을 위한 대통령선거에서 팀스터즈의 지지를 확약받은 리처드 닉슨(재임 1969년 1월~1974년 8월)은 호파가 1980년 3월6일까지 팀스터즈의 사업과 활동에 관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감형했고, 1971년 12월23일 마침내 호파가 감옥에서 풀려났다.

팀스터즈 위원장에 복귀하려는 열망이 컸던 호파는 자신의 활동을 금지한 닉슨 행정부의 결정이 불법이라며 소송을 걸었지만, 실패했다. 팀스터즈 내부의 지지도 크지 않자, 호파는 중앙집행부로의 복귀를 포기하고 여전히 영향력을 갖고 있던 디트로이트 299지부와 관계를 맺으면서 피치몬스 위원장이 노조 기금을 조직폭력단에 연루된 사업에 유용했다는 내용의 자서전을 준비했다. 호파는 이 책의 출판을 보지 못했다. 출판 몇 달 전인 1975년 7월30일 호파가 실종됐기 때문이다. 이날 호파는 조직폭력단 소속으로 팀스터즈 560지부 간부를 맡고 있던 안토니 프로벤자노와 조직폭력배 안토니 지아칼로네를 디트로이트 교외 식당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두 폭력배는 나타나지 않았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밥으로 스테이크를 먹을 거라 말한 게 호파의 끝이었다.

영화 <아이리시맨>은 호파를 살해했다고 주장한 프랭크 시런(1920~2003)의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고기 운송트럭을 몰던 시런은 알고 지내던 조직폭력단 두목인 러셀 버팔리노를 통해 호파를 알게 됐고, 이후 호파의 오른팔이 돼 호파의 적수들을 살해하고 제거하는 데 앞장선 대가로 팀스터즈 지부장까지 꿰찼다. 영화에서 시런 역은 로버트 드니로, 호파 역은 알 파치노, 또 하나의 주인공 버팔리노 역은 조 페시가 맡았다. 로버트 드니로는 1960년대 호파의 명성이 비틀즈나 엘비스 프레슬리와 동급이었다고 평가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가조직의 비호 아래 조직범죄와 조직노동이 결탁한 시기가 있었다. 한국노총의 기원으로 대한노총으로 불린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1946년 3월~1960년 11월)이 대표적이다. 대한노총이 미군부와 이승만 세력을 등에 업고 사회주의 노동운동 조직인 전평의 운동가들을 살해하고 제거하는 데 열을 올리던 무렵인 1946년 12월, 호파는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팀스터즈 299지부장 자리를 꿰차면서 권력을 향한 발판을 확보하게 된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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