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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벽 위에서

기사승인 2020.02.17  08: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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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훈 기자

지상 74미터 높이였는데, 그는 어디 히말라야 고산에서나 입을 빨간색 커다란 패딩점퍼 차림이었다. 겨울이었고, 그곳엔 전기가 들지 않아 온열 매트 따위에 등을 지질 형편이 못 됐다. 늙은 해고자는 눈 덮인 산꼭대기처럼 하얗던 건물 꼭대기에 천막 치고 그저 오래 버티는 것으로 복직 싸움을 이어 갔다. 조난신호였다. 노조할 권리가 그곳 병원에서 자주 위태로웠다. 누군가에겐 목숨을 걸 일이었다. 마음 졸인 사람들이 그 아랫자리에서 곡기 끊는 것으로, 멀리서 걸어오는 것으로, 집회를 이어 가는 것으로 응답했다. 일단락됐다. 내려오는 사다리에서 박문진 지도위원은 한동안 머뭇거렸다. 흰 바람벽 위에서 삭인 시간이 227일이었다. 해고된 지 13년 만이다. 그의 친구 김진숙이 마중 나왔다. 꼭 안고는 장미 꽃다발을 멋쩍게 건넸다. 비싸서 스무 송이만 사 왔단다. 나중에 나이에 맞춰 더 사 줘야 한다고 말했다. 서른아홉이던가, 누군가는 마흔 송이를 보태야 한다고 했다. 정년이 가까웠다. 한때 흰색 옷차림 나이팅게일을 꿈꿨던 청년은 어디 높은 산에서 어울릴 만한 등산복 차림으로 정년 앞에 섰다. 그 안에 노조 조끼 껴입는 걸 잊지 않았다. 푹 눌러쓴 모자 사이로 머리칼이 하얗다. 노조할 권리 얼마간을 흰색 종이 위에 새긴 뒤다.

정기훈 photo@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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