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다혜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

대상판결 : 서울행정법원 2020. 1. 10. 선고 2018구합52532 판결


1. 사실관계

고 이○○님은 2012년부터 주식회사 한솔케미칼 전주공장에서 LG디스플레이·삼성전자 등에 납품하는 전극보호제·세정제 등 전자재료 생산업무를 수행하던 중 입사 3년10개월 만인 2015년 31세 나이로 급성림프구성 백혈병이 발병했고 2016년 8월3일 사망했다. 망인의 유족은 백혈병 발병과 망인의 사망이 업무상재해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유족급여 및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망인의 근무 당시 작업환경측정 보고서상 벤젠·1,3-부타디엔·포름알데히드는 확인되지 않았고 역학조사시 실시한 시료분석 결과 일부 백혈병 유해인자가 검출됐지만 기준치보다 낮은 극미량이었다며, 업무상질병에 의한 사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2. 대상판결의 주요 판단 내용

먼저 대상판결은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의 목적 및 기능, 첨단산업 분야의 안전보건상 특성, 화학물질에 의한 직업병에서 근로자를 보호해야 하는 현실적·규범적 이유, 사업주의 협조 거부 또는 관련 행정청의 조사 거부 등의 사정과 같이 상당인과관계 판단시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해야 하는 상황 등을 상세하게 밝힌 2017년 대법원 판결을 주요하게 적용해 이 사건을 판단했다(대법원 2017. 8. 29. 선고 2015두3867 판결).

법원은 아래 각 사정을 위 대법원 판결에 비춰 살펴볼 때, 망인이 한솔케미칼에서 일하던 중 벤젠·1,3-부타디엔·포름알데히드 등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백혈병이 발병했고 백혈병이 악화해 사망에 이르게 됐다고 평가하면서 망인의 사망과 업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① 한솔케미칼은 망인이 근무한 전주공장에서 백혈병 유해인자인 벤젠 등이 취급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환경부가 관련 법에 따라 주기적으로 공개하고 있는 한솔케미칼의 ‘화학물질 배출량 정보’, 이 사건 역학조사 결과 중 시료 분석 결과 및 환경노출평가 결과 등을 종합할 때 망인이 이 사건 상병의 주요 유해인자인 벤젠·1,3-부타디엔·포름알데히드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왔던 것이 확인된다.

②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이 사건 역학조사 결과 측정한 각 백혈병 주요 유해인자 수치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상의 노출기준 범위에 많이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동법 시행령의 노출기준은 예시적인 기준으로 규정된 것이고 그 기준을 충족하지 아니한 경우라도 업무 수행 중 노출된 화학물질로 인해 백혈병 등 조혈기관 계통의 질환이 발생했거나 적어도 발생을 촉진한 하나의 원인이 됐다고 추단할 수 있으면 업무상질병으로 인정할 수 있다.

③ 위 법상 기준치는 해당 유해인자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경우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벤젠·1,3-부타디엔·포름알데히드 등 여러 유해인자에 복합적으로 노출된 경우에는 유해요소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질병 발생의 위험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망인은 발병 직전인 2014년도 및 2015년도에 상당한 초과근무를 했는데 해당 기간 월평균 근무시간을 고려하면 망인은 통상적인 근로자보다 월등히 많은 시간 동안 위 각 유해인자에 노출됐을 것으로 판단된다.

④ 이 사건 법원에 제출된 직업환경의학전문의의 소견에 따르면 기준치에 미달하는 유해인자에 노출됐다 하더라도 망인의 장시간 근로, 유해물질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작업방식 등을 고려할 때 업무관련성을 인정할 수 있다.

⑤ 원고가 제출한 자료 및 이 사건 역학조사 결과 등을 보면 망인이 근무를 시작한 이후 해당 작업장에서 계속적으로 벤젠·1,3-부타디엔·포름알데히드가 발생된 사실이 확인됨에도 불구하고 한솔케미칼이 실시한 작업환경측정을 보면 각 유해인자는 측정대상에서 제외돼 있어 해당 기간 동안 실제로 유해인자 수치를 측정한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부실한 측정을 한 한솔케미칼이 망인의 이 사건 발병 이전에 유해인자에 대한 노출 방지 조치를 적절히 취하고 있었는지도 다소 의문이 든다.

⑥ 이 사건 역학조사는 백혈병 진단일로부터 약 1년 가까이 지나서야 실시된 것으로 망인의 근무 당시 작업환경을 그대로 반영한 측정 결과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점을 더해 보면, 망인이 위 기간 동안 실제 각 유해인자에 노출된 수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한편 이 법원의 진료기록감정촉탁 결과 역시 이 사건 역학조사 결과를 토대로 했다는 점에서 이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⑦ 법원은 이 사건 소송 과정에서 문서제출명령·사실조회·문서송부촉탁 등 소송법상의 여러 절차를 거쳤는데, 한솔케미칼과 산업안전보건연구원·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업무상 비밀 등을 이유로 망인의 백혈병 주요 유해인자 노출 정도 판단에 영향을 줄 여지가 있는 자료들을 제출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와 같은 자료 제출 거부는 망인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어느 정도 고려할 수밖에 없다.

⑧ 그 외에도 망인은 백혈병의 호발연령에 해당하지 않고 다른 건강상의 결함이나 생활습관·가족력 등 유전적인 요소도 확인되지 않는다.

3. 검토 및 의의

업무상재해로 인정되기 위한 업무와 재해 사이의 인과관계에 관한 입증책임은 이를 주장하는 재해자(내지 유족)가 부담한다(대법원 1997. 2. 28. 선고 96누14883 판결 등). 따라서 부실한 재해조사 내지 역학조사, 사업주의 협조 거부, 행정청의 자료제출 거부 등에 따른 입증 곤란 상황을 근로복지공단과 사업주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면, 작업환경상 유해요인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재해와의 인과관계를 판정하지 못하는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우려가 상당하다.

다행히도 최근 법원은 다수 판결에서 근로복지공단의 부실한 재해조사 내지 역학조사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그로 인해 야기된 산재 불승인 처분이 위법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법원은 삼성전자 LCD공장 다발성경화증 사건에 대한 판결(대법원 2017. 8. 29. 선고 2015두3867 판결)에서 “사업주의 협조 거부 또는 관련 행정청의 조사 거부나 지연 등으로 작업환경상 유해요소들의 종류와 노출 정도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인정된다면, 이는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단계에서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 있다”고 하면서 해당 사건에서 사업주인 삼성전자가 어떤 정보를 은폐했는지 구체적으로 지적했고, 이는 이후 사건에서도 법원의 일관된 태도로 나타나고 있다.

대상판결에서 법원은 근로복지공단이 불승인 처분의 근거로 제시한 망인의 근무 당시 작업환경측정 결과와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역학조사의 각 타당성 및 신뢰도를 검토해 이를 바탕으로 공단 처분의 적법성 여부를 판단했다. 이 과정에서 화학물질관리법에 근거해 환경부가 생산한 ‘화학물질 배출량 정보’ 등의 다양한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삼았다. 또한 법원은 대상판결에서 ‘관련 자료 제출 거절 내역’이라는 목차를 따로 할애해 이 사건 소송 과정에서 사업주인 한솔케미칼(법원의 문서제출명령을 반송하기도 했다) 외에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안전보건공단이 “사업주가 영업비밀에 해당한다며 비공개 요청을 했다” “업무상 비밀에 해당한다”며 망인이 직접 수행한 공정과 물질에 관한 자료에 해당하는 물질안전보건자료·공정안전보고서 등의 제출을 거부한 사정을 상세히 적시했다. 그리고 사업주와 행정청이 제출을 거부한 자료들은 “망인의 백혈병 주요 유해인자 노출 정도 판단에 영향을 줄 여지가 있는 자료들”에 해당한다면서 이를 고려하면 “사업주 내지 관련 행정청의 위와 같은 자료 제출 거부는 망인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어느 정도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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