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지혜 서울청년유니온 위원장

‘공감성 수치’라는 말이 있다. ‘드라마 주인공이 창피를 당했을 때, 자신도 마치 그 상황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수치스러운 감정을 그대로 느끼는 증상’이라고 한다. 공감성 수치를 느끼는 포인트가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요즘은 굳이 드라마를 보지 않아도 공감성 수치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총선 일정이 다가오고 있어서 보기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뉴스와 글을 자주 접한다.

예컨대 스스로를 ‘도전하는 혈혈단신 청년’으로 지칭하는 변호사 출신 국회의원 도전자를 보면 그렇다. 자녀 부정채용 의혹 등으로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한 국회의원에 대해 당대표가 “당과 나라를 생각한 결단”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공감성 수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고, “조작은 있었지만 무죄”라는 채용비리 판결이 나자마자 총선 예비후보 등록을 한 국회의원의 행동도 사실 좀 부끄럽다.

드라마에서 공감성 수치와 정치에서 공감성 수치는 다르다. 드라마를 볼 때 공감성 수치가 싫으면 그 장면을 넘기면 된다. 그 장면은 지나간다. 그러나 정치는 그럴 수 없다. 만약 정치에서 시민이 그 장면을 넘기고자 한다면 그건 정치를 외면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가장 다른 점은 정치가 주는 공감성 수치는 분노에 기반해 있다는 점이다. 청년의 정체성으로서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는 사람이 청년임을 내세우며 자신을 추켜올리는 상황에서, 채용비리를 저질러 당연히 국민을 대표하는 직을 그만둬야 마땅한데도 운 좋게 무죄를 받은 사람을 대의명분으로 포장하는 상황에서 그렇다. 채용비리에서 법적 면죄부를 받자마자 아주 홀가분해진 정치인을 보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정치가 청년을 팔아 대고 채용비리 따위로 청년에게 좌절을 안기는 동안 지난 9일 해외에서 승선실습을 하던 대학생 실습 선원이 숨진 사고가 발생했다. 그는 열사병 의심증세로 쓰려졌다. 실습 선원인 학생이 숨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7년에도 실습 선원이던 대학생이 무더위에 하루 12시간씩 작업을 하다가 숨진 사건이 있었다. 관련 기사에서 해양대 학생은 “만약 외항선 실습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는 ‘자진 하선’을 선택하면 사실상 부적격자로 분류돼 향후 취업이 어려워지는 등 각종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청년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연명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의 정치는 ‘청년 실습생’의 죽음에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학생이라고 하기엔 과로에 시달리고 노동자라고 하기엔 노동법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그렇게 경계 위의 청년이 바다에서 스러져간 상황 앞에 정치는 더없이 무책임하다. 부조리한 현실을 견디는 것이 미덕인 사회, 기업과 학교가 그것을 요구하는 세상 앞에 정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청년정치인을 자임하며 공정한 기회를 달라는 것도, 청년을 위한다는 말은 많이 하지만 ‘내 주변의 청년만’ 위하는 정치인도 백만 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래도 이것만은 인정했으면 좋겠는데,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비극에 누구보다도 비통해하며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할 정치가 너무나 무감하다는 것이다. 결국 총선을 앞둔 정치인의 행보를 보면서 시민이 공감성 수치를 느낄 일이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자꾸만 겪게 하면서도 개전의 정이 없는, 공감성이라고는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기 어려운 정치인들이 오늘날의 상황에 수치심을 느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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