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시현 선생(사진 오른쪽)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일제하 독립운동에 뛰어든 선열과 지사들의 삶이 파란만장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김시현도 누구 못지않게 격렬하고 열정적인 인생행로를 걸었다.

영화 <밀정>의 실제 독립투사 모델이기도 한 그는 3·1 운동 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해방될 때까지 26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15년6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해방된 뒤에도 8년이나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항일 시기뿐만 아니라 해방된 뒤 분단에 맞서고 독재와 싸웠기 때문이다. 그의 감옥 경력이 말해 주듯이 그는 한마디로 초지일관의 행동파 지식인이었다.

김시현(金始顯)은 국운이 기울던 1883년 안동시 풍산읍 현애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호를 처음에 고향에 있는 산인 학가산의 오른편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로 학우(鶴右)라고 하다가 나중에 무엇을 구한다는 뜻의 하구(何求)로 고쳤다. 이는 항일투쟁 과정 중에 감옥을 자주 드나들자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이 도대체 무엇을 구하려 이 짓을 하느냐고 하자 호를 하구로 고치게 됐다고 한다. 그가 한평생 구하고자 한 것은 조국의 독립이요 자주요 민주였을 것이다.

의열투쟁의 시작

만 16세 되던 1899년 그는 신학문을 배우고자 서울로 가 그해부터 3년 동안 중교의숙에 다녔으며 만 19세에 졸업했다. 이후 경상도 지역 교육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된 교남교육회에서 활동했다. 당시의 큰 흐름이었던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한 것이다. 27세 되던 1911년 일본 메이지법률학교(메이지대 전신) 전문부에 입학해 법률공부를 하게 됐다. 만 35세 되던 1917년 귀국했다.

3·1 운동은 그가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뛰어드는 출발점이 됐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가만있지 않았다. 안동·예천을 거쳐 상주에서 활동하다가 시위운동자로 연루돼 상주헌병대에 체포돼 2개월간 구금됐다. 그는 나오자마자 상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 정도 된 시기였다. 그는 두 달 정도 머물다가 다시 만주 길림으로 향했다. 만주로 가게 된 것은 무력투쟁을 하기 위한 결심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는 김좌진을 만나 군정서를 조직하는 데 참가하고 황상규와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 결성에 참가했다.

1919년 11월께 국내에 잠입해 1920년 9월 체포될 때까지 군자금 모금·동지 규합·무기 구입 같은 많은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활동했다. 그는 의열단 최초의 거사계획에 동참했다. 1920년 4월부터 두 차례에 걸쳐 상해에서 곡물로 위장한 무기와 폭탄을 반입해 경남 밀양과 진영에 보관했다. 그러나 6월께 폭탄 은닉사실이 발각돼 연루된 단원들 대부분이 체포되고 계획은 무산됐다. 그는 이때 청산리전투를 재정지원하는 일에 매달리는 한편 군사주비단에도 관여했다. 군사주비단은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준비하게 위해 만든 비밀조직이었다. 1920년 12월 일제에 군사주비단 관련자 27명 가운데 17명이 붙잡혔는데 김시현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러한 의열단과 군사주비단 활동, 대한군정서 자금지원 등의 활동에 얽혀 1920년 12월 대구에서 체포됐고 이듬해 10월 석방됐다.

극동민족대표회의에 참석

김시현이 감옥에서 나왔을 때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극동민족대회(극동노력자대회 또는 극동인민대표회의라고도 함)에 참가할 대표단을 짜기 위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노동대회 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됐다. 이러한 배경에는 일제 경찰 간부인 경기도 경찰부 경부인 황옥이 있었다. 황옥은 여러 독립운동가를 도우면서도 경찰조직 상부에는 독립운동의 정보를 빼내고 거사를 확인해 일망타진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도 황옥은 김시현을 위해 50원의 여비와 여행증까지 마련했다.

지금까지도 황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다. 일제의 프락치였는지, 이중간첩이었는지 아니면 의열단원으로서 독립운동가였는지 확실한 정설은 없다. 다만 김시현은 대구에서 체포돼 서울로 압송돼 가는 중에 황옥을 처음 만난 이래 황옥을 감화시켜 민족의 일꾼으로 돌려세웠다고 확신했다.

김시현은 상해에 가서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뒤 여운형·나용균·김규식과 함께 만주를 거쳐 이르쿠츠크로 갔다. 이르쿠츠크에서는 그해 여름에 일어난 자유시참변(흑하사변이라고도 함)을 마무리 짓는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자유시참변은 독립군 부대끼리의 갈등으로 총격전이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일이다. 우리 독립운동사의 최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남의 나라 땅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을 접하고 김규식·여운형 등과 함께 배석판사로 참석해 더 이상의 희생이 없도록 무죄판결을 이끌어내는 데 힘을 쏟았다.

이르쿠츠크에서 열리기로 한 회의는 1922년 1월 말로 연기하고 모스크바로 회의 장소를 변경했다. 회의는 1월21일부터 2월2일까지 13일 동안 진행되고 대회선언을 채택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김시현은 김규식·최창식·한명세와 더불어 4명의 외교위원 중 한 명이 돼 회의 후에도 모스크바에서 머물며 활동했다.

김시현이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특기할 만한 것은 그의 평생 반려가 된 혁명적 동지인 권애라(權愛羅)라는 여성을 만난 것이었다. 권애라는 개성 호수돈여고와 서울 이화학당 보육과를 나온 신여성이다. 3·1 운동 때 6개월간 옥고를 치뤘으며 이후 상해로 와서 경해여숙대 사범과에 다니며 애국부인회에도 가입했다. 극동민족대회에 오게 된 것은 고려공산당 상하이지부로 대표로 파견됐기 때문이었다. 사실 김시현은 고향집을 지키고 있는 김오월이라는 여성과 이미 결혼한 터였다. 당시에는 이렇듯 운동가들끼리 두 번째 결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시현과 권애라는 이후 각자 운동일선에서 활약하면서도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의열투쟁의 한가운데에서

1922년 5월 모스크바에서 상해로 돌아온 김시현은 의열투쟁에 뛰어들었다. 김원봉·장건상과 협의해 국내에 대규모로 무기를 반입해 거사를 일으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는 황옥을 끌어들였다. 황옥을 중국으로 불러들여 천진에서 김원봉을 만나게 해 의열단에 가입하고 서약하는 의식을 하도록 했다. 대형폭탄 6개, 소형폭탄 30개, 시한폭탄용 시계 6개, 뇌관 6개, 권총과 탄알 수백발, 조선혁명선언 등 전단지 수백장을 국내로 옮길 계획이었다.

국내에 반입까진 성공했지만 은닉하는 과정에 김두형(본명 권상호)이라는 자의 밀고로 탄로 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김시현은 체포돼 징역 10년을 받았다. 황옥도 역시 체포돼 10년형을 받았다. 김시현은 죽음을 각오하고 단식했다. 부친인 김태동이 면회를 와서 단식을 중단하지 않으면 오늘 밤 집에 가서 칼을 꽂고 먼저 죽겠다고 하자 단식을 중단했다고 한다. 김시현은 감형으로 형기가 줄어들어 6년 만인 1929년 1월29일 대구형무소에서 석방됐다. 석방되던 날 권애라는 아들 봉년을 데리고 마중을 나왔다.

가족과 친척들이 고향에 돌아가 건강도 되찾고 요양하며 섭생을 하라고 권했지만 들은 체하지 않았다. “나의 섭생은 독립운동뿐이오” 하고 다시 만주 길림으로 향했다. 길림에서 다시 천진으로 가 김규식을 만났는데 김규식은 김원봉이 추진하는 남경 군사간부학교 소식을 알려 줬다. 두 사람은 남경을 방문해 김원봉을 만났다. 9년 만의 해후였다.

의열단은 의열투쟁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독립전쟁 노선으로 방략을 바꿔 군사간부를 길러 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를 위해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김원봉은 김시현에게 의열단 북경지부장으로서 역할을 주고 간부학교 생도를 모집하는 초모관 일을 맡겼다.

의열단 북경지부장으로서 북경뿐만 아니라 국내와 만주 화북·화중지역을 아우르는 초모관 일을 했다. 안동 출신 이육사도 그를 통해 남경 군사간부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1933년 6월 말 남경에서 열린 의열단 전체회의에서 그는 김원봉과 함께 7명의 중앙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북경에서 의열단 지부장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낙양에 있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시킬 한인 청년 모집에도 주력했다.

1934년 10월에는 일제 밀정 노릇을 하던 배신자 한삭평(일명 박준빈)을 처단하는 일을 했다. 군사간부학교 교관이던 노을룡과 다른 동료와 함께 면밀한 준비를 한 끝에 성공했다. 이 일로 일제경찰에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939년에 9월 풀려났다.

이듬해인 1940년 북경으로 가서 활동하다가 일본 영사관 구치감에 갇혀 1년 동안 미결 상태로 구금됐다. 단식투쟁을 벌여 35일 만에 서울의 일본 헌병대로 옮겼으나 건강이 악화돼 위독한 상태가 되자 보석으로 풀려났다. 풀려나자마자 몸을 추스리지도 않고 다시 북경으로 탈출했다. 1944년 4월 다시 검거돼 서울로 이감됐다가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이렇듯 일제하 그의 삶은 오직 독립운동과 의열투쟁의 한길에 있었다.

노세극 4·16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아직도 독립유공자 서훈 못 받아

해방 후 그는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고 귀환동포 구제사업이나 좌우합작위원회 위원, 민족자주연맹 집행위원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1949년 민주국민당에 참여해 1950년 2대 국회의원선거에 안동 갑구에서 후보로 나와 당선했다.

그는 이승만의 폭정을 더는 볼 수가 없어서 의열단 활동을 했던 평생 동지인 류시태와 함께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52년 6월25일 6·25 2주년 기념식이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열리게 되자 류시태로 하여금 단상 가까이에 앉게 하고 권총을 줘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불발되는 바람에 미수에 그치게 됐다. 일제시대 의열투쟁 방식으로 반독재투쟁을 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무기징역을 받아 옥살이를 하다가 1960년 4·19 혁명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8년간 옥살이를 한 셈이다.

이 일로 그는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표창이나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징역형을 받은 사람에게는 국가유공자로 포상할 수 없도록 규정한 법령 때문이다. 하루빨리 재평가가 이뤄져서 독립유공자로 자리매김하고 기려야 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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