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5년 12월14일 종로경찰서가 작성한 감시대상인물카드 속 이효정 선생. 국사편찬위원회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여기 한 여인이 있다. 일찍이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 항일독립 의지를 유전자에 새겼고, 꽃피는 여고보 청춘시절부터 반일항쟁의 대오에 앞장섰으며, 여성노동자들의 권익과 해방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사람. 해방과 분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대의 고난을 고스란히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졌던 사람. 해방된 조국에서 ‘빨갱이’로 몰려 저주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한 번도 ‘통일조국의 꿈’ ‘민중해방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 그러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꿈을 대놓고 이야기하지 못했던 사람. 독립유공자 이효정. 그는 여든이 넘어 다시 찾은 ‘시인의 꿈’을 통해 자신이 걸어온 길을 이렇게 묘사한다.

식민지 민족의 설움도 겪었고/ 원자탄의 위력도/ 악랄한 일제가 쫓겨 가는 꼴도 보았지요/ 해방의 벅찬 기쁨에 설레기도 했고/ 한 나라 같은 겨레가 반쪽으로 갈라지는/ 아픔을 안고/ 동족상잔의 기막힌 꼴도 당했지요/ 독재와 불의에 항거하는 젊은이들의/ 세찬 함성의 소용돌이/ 3·15의거 4·19학생의거 광주항쟁/ 5·16군사독재 5·18 똑똑한 정치인들의/ 입씨름/ 돈독이 오른 머저리 군인 대통령/ 일제가 아닌 같은 겨레의 모진 고문으로/ 죽은 박종철/ 겨레가 쏴댄 최루탄 파편에 죽은 이한열/ 아, 해방만 되면 독립만 되면/ 오순도순 평화의 낙원을 이룰 줄/ 믿었는데….”(이효정의 시 <아직 이 時代> 중에서)

이효정은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항일독립운동 하느라 그 많던 문전옥답을 팔아 버린 증조할아버지 이규락(항일의병장)에서 그 자손들인 이동식(항일운동가)·이동하(독립유공자)·이경식(독립유공자)까지. 바로 윗대로는 세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 이병용의 형제들인 이병린(항일운동가)·이병기(항일운동가)·이병희(독립유공자)도 있다. <광야>의 시인 이육사(1904~1944)는 그의 할아버지뻘 되는 친척이기도 하다.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나고 자란 이효정에게 항일독립운동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동덕여고보 시절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장만옥과 왕조위가 출연한 왕가위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고, 요즘 TV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제목이기도 하다. 꽃 같은 나이 동덕여고보 시절 그의 꿈은 당연히 조선독립이었고, 그 다음이 명필이 되는 것이었다.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 붓글씨를 배운 그는 동덕여고보 2학년 때 학교 창립 10주년 기념 학예회에 나가 서예 부문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물론 문장력도 뛰어나 작문 시간마다 선생님들에게 칭찬을 받기도 했다.

동덕여보고에서 이효정은 일생에 큰 영향을 끼친 인연들을 만나게 된다. 우선 조선공산당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이관술이 그의 스승이었으며, 졸업 후 인생 진로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효정의 친척이던 이종희는 적색노조운동에 투신했다가 종연방직 파업 때 이효정과 함께 검거된 바 있다. 이순금은 반제동맹 동덕여고 책임자였으며, 해방 후에는 남로당 중앙위원을 역임했다.

이효정이 여고보 2학년이던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터졌다. 분노의 파도는 전국으로 퍼져 나가 5만4천여명의 학생들이 동맹휴학과 반일시위에 참가했다.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반일투쟁이었다.

당연히 동덕여고보에서도 반일시위가 벌어졌다. 일제는 기마경찰을 출동시켜 학생들을 진압하려 했지만 이효정은 겁도 없이 시위의 앞장에 섰다. 오직 잘 싸워서 이겨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선생님들은 “저 애가 평소에 말도 한마디 없이 얌전하던 그 이효정이 맞느냐”고 수군댔다.

그로부터 1년 뒤 광주학생운동 1주년이 되자 이효정은 ‘백지동맹’을 조직한다. 백지동맹이란 시험지에 답변을 적지 않고 백지로 제출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 친구가 약속을 어기고 답안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험 시간이 끝난 후 이효정이 질책하자 그 친구는 이렇게 핑계를 댔다. “너희들은 답안을 몰라서 못 쓴 거”라고. 그러자 이효정은 이렇게 대꾸했다.

“우리야 답을 몰라서 그렇다 치고, 전교 1등하는 진홍이는 왜 답을 안 썼을까?”

그 친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함경북도 명천의 빈농 출신인 박진홍은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여고보 시절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한 신문은 이를 두고 “동덕학교 개교 이래 초특급”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박진홍과 이효정은 학교시설 보수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도 조직했다. 주동자들은 대부분 무기정학을 받았고, 박진홍은 퇴학당한다.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다른 동무들은 다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공부도 잘했지만 정의감도 강했던 동무 박진홍은 졸업 후 경성트로이카에서 재회하게 된다.

운명적으로 만난 이재유와 경성트로이카

동덕여고보를 졸업한 이효정은 스승 이관술의 소개로 울산의 한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된다. 그러나 요시찰인(要視察人)이라는 주홍글씨는 일제강점기 내내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결국 1933년 학교에서 쫓겨난 이효정은 다시 경성으로 올라와 운명적으로 이재유와 조우하게 된다.

함경도 출신의 노동운동가 이재유가 주도하고 훗날 남부군 사령관이 된 이현상과 김삼룡 등이 참여한 경성트로이카는 의료보험 실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파업의 자유, 동일노동 동일임금, 주 40시간 노동 쟁취, 최저임금제, 임시직 근로자에 대한 처우개선, 산업별노동조합 추진, 사형제 폐지 등 당시로서는 가장 선구적인 강령을 내걸고 활동한 비밀지하조직이었다.

이효정은 공장 외곽에서 파업위원회 위원으로 일하면서 섬유 부문을 책임지고 있던 이현상과 이재유 간의 비밀연락을 담당했다. 그는 경성트로이카 사건이 터지면서 1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된다.

출소 후 그는 울산 교사 시절 안면이 있었던 박두복(1914~?)과 결혼한다. 박두복은 교원노조 활동을 하다가 2년간 옥살이를 했던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이효정은 박두복을 참으로 어질고 의협심이 강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와 결혼해 2남1녀를 낳고 키웠던 7년간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추억한다.

해방과 분단, 좌우대립 그리고 전쟁

마침내 해방의 날이 밝았다. 그러나 감격도 잠시,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는 희망은 분단과 미군정의 탄압으로 좌절되고 만다. 여운형이 주도하던 건국준비위원회 울산 대의원으로 활동하던 남편은 사흘이 멀다 하고 경찰에 붙들려 다녔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그는 한국전쟁으로 감옥이 무너지자 동료들과 월북한다.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이효정은 그런 남편이 섭섭하긴 하지만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뭐.”

그러나 말 한마디 없이 떠난 남편이 남겨 준 유산은 ‘빨갱이’라는 주홍글씨였다. 해방 후 복직했던 울산 태화보통학교에서는 ‘당연히’ 쫓겨났다. 무시로 집에 들이닥치는 경찰들을 피해 길거리를 전전했다. 그래도 3남매를 데리고 목숨은 부지해야 했기에 과일장사를 비롯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북으로 갔던 남편이 남파됐다 북으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다시 경찰에 붙들려 갔고, 일제 치하처럼 고문이 시작됐다. 남편과 함께 북으로 갔다 내려온 시동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찰과 연행은 일상이 됐다. 한 번은 열두 살 된 딸아이가 “왜 아무 죄도 없는 우리 엄마를 끌고 가느냐”며 형사들에게 대들었다가 뺨을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적도 있었다.

큰아들 박진수는 가난과 경찰의 핍박 때문에 또래 아이들에게 몰매를 맞기 일쑤였다. 외로움과 슬픔에 잠긴 소년이 홀로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림 그리기였다. 그리고 그는 화가가 됐다.

자신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부모들의 선택 때문에 ‘빨갱이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평생 고통과 차별 속에 살아야 할 자식들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서 이효정은 자식들에게 사상이나 이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이들 아버지에 대해서도.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연좌제 때문이었다. 큰아들은 사업상 필요에도 불구하고 해외로 나가지도 못했고, 심지어 야간통행금지도 해서는 안 될 금기였다. 이효정의 가슴에는 피멍이 들었다. 돈이 없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도 못했는데….

나이 여든에 시인이 되어

그의 나이 일흔다섯이던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났다.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됐고, 5년 후에는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군인이 아닌 사람이 대통령이 됐다. 늘 삶을 옥죄던 사찰도 없어졌다. 민주화의 봄과 함께 마음에도 문학의 꿈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어느 문학회에서 주최한 ‘독자와의 만남’에 다녀온 날은 너무 기뻐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무려 60여년을 잠복해 온 그의 시재(詩才)는 마침내 <회상>과 <여든을 살면서>라는 두 권의 시집으로 결실을 맺었다. 기쁨은 또 있었다. 2006년 8월15일 정부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을 재조명하면서 이효정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한 것이다. ‘빨갱이’의 오명을 벗고 마침내 ‘독립유공자’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 일이다. 그의 나이 아흔세 살이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한생을 시로 형상화하고 있는 이윤옥은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에서 이효정의 삶을 이렇게 노래한다.

나라가 없는 판에 시험이 다 무엇이냐/백지동맹 앞장서던 겁 없는 열여섯 처녀/ 광주학생 만세 함성 듣고/ 피 끓어 떨치고 일어선 종로거리 만세운동// 경성 트로이카 열혈 청년 이재유 도와/ 노동자 권리 찾다 고등계 형사에 잡혀/ 갖은 고초 당했어도 의연한 자세/ 죽음을 불사한 민족차별 철폐운동 후회는 없어// 폐병 견뎌가며 쟁취한 해방된 이 땅에서/ 안락을 구걸한 적 없다마는/ 사회주의 남편 빨갱이로 몰려 숨죽여 살던 삶// 어린 삼남매 부여잡고/ 떠돌던 시절을 더는 묻지 말라/ 영혼 떠나버린 빈 껍질 홀로 추슬러/ 마산 딸네 집 허름한 뜨락의/ 이름 없는 들꽃을 사랑하다/ 두 권 시집 남기고 홀연히 떠난 자리/오늘도 목백일홍 저 혼자 외롭게 피어 있네”

2010년 8월14일. 예순다섯 번째 광복절을 하루 앞둔 이날 이효정은 한 세기에 걸친 파란만장한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비록 인생 말년에 민주화도 진척되고 건국포장도 받았으나 그는 끝내 자신의 사상이나 이념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야, 감옥에 가든지 죽으면 그만이지만 자식들이 어떤 고초를 당할지….”

그의 슬픈 눈망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듯하다.

‘국가보안법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부라리는데,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독립된 게 맞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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