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 열린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 전체회의 모습. 경제사회노동위원회

A씨는 올해 게임업체 펄어비스에서 퇴사했다. 지난해 10월 도입된 재량근로제 대상자였던 A씨는 도무지 자신의 ‘재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장시간 업무 환경에 지쳤다고 한다. 재량근로제는 사용자가 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를 통해야만 실시할 수 있는 제도지만, A씨는 이 제도에 합의한 근로자대표가 누군지 들어 본 적도 없고,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권한은 많은데 실체는 모호한 근로자대표

사업장 내 노동자들의 고용·근로조건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지만, 정작 노동자 열에 아홉은 그 실체를 본 적이 없다는 근로자대표. 2018년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 시행 이후 탄력근로제·유연근로제·선택근로제·재량근로제 등 근로기준법이 정한 최저선을 회피할 ‘우회로’를 찾는 기업들이 많아지면서 제도 시행의 합의 주체인 근로자대표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하지만 근로자대표 제도가 가진 문제점이 개선되지 않으면서 대다수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는 요원한 상태다.

근로기준법을 포함해 노동관계법은 근로자대표에게 사용자와 탄력근로제를 비롯한 각종 제도 시행에 합의할 권한을 주고 있다. 사용자는 파견노동자를 사용할 때나 경영상 해고를 할 때도 근로자대표와 협의해야 한다. 2018년 말 기준 우리나라 노조 가입률이 11.8%인 점을 감안하면, 90% 사업장에서 근로자대표가 과반수노조를 대신해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근로자대표에게 주어진 각종 권한과 달리 그 실체는 모호하다. 노동관계법 어디에도 ‘근로자대표’라는 용어만 있을 뿐 선출방법·임기·권한·합의 효력은 명확한 규정이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다수 사업장에서 근로자대표는 깜깜이 대표나 다름없다. 회사가 임의로 지명하는 이가 근로자대표가 돼 고용·근로조건에 관한 주요사항을 합의하거나 그마저도 없이 회사 마음대로 하는 일이 벌어진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8년 5명 이상 사업장 2천436곳을 대상으로 탄력근로제 도입시 근로자대표와 협의하는지 여부를 물었는데 “별도로 협의하지 않았다”는 답변이 57.7%로 가장 많았다. 이 결과는 우리나라 대다수 사업장의 현실을 보여준다.

그나마 30명 이상 사업장은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근로자참여법)에 따라 ‘노사협의회’를 운영하고 있지만 사정은 비슷하다.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은 과반수노조가 위촉할 수 있는데, 과반수노조가 없는 경우 구체적인 선출 방식 규정이 없어 변칙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6년 30명 이상 사업장 586곳을 조사한 결과 노사협의회를 운영하는 335곳 중 회사가 지명하거나(13.4%), 간접선거(11.0%)로 근로자위원을 뽑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노사 ‘선출 절차 법에 명시’만 공감, 각론서 이견

수년 전부터 지적돼 온 근로자대표제도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는 지난해 12월부터 해당 의제를 논의하고 있다.

최근까지 일곱 차례 전체회의를 갖고 노사 입장을 조율하고 있는데 “근로자대표 선출 절차를 법에 명시하자”는 것을 제외하고는 각론에서 노사 간 이견이 커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노총은 구체적인 근로자대표 선출 절차, 예컨대 선거권·피선거권 보장과 근무시간 중 선거활동 보장을 법에 명시하자는 입장이다. 특히 사용자의 개입과 관여를 배제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제재 수단(처벌조항)을 둬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선출된 근로자대표의 활동보장을 위해 근무시간 중 유급활동과 임기 보장, 근로자대표들이 함께 모여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근로자대표회의(종업원평의회) 설치도 주요하게 요구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한 발 더 나아가 독일식 종업원대표제처럼 노동자 경영참여까지 논의가 확대돼야 한다며 ‘노동자경영참가법’ 제정을 주장한다.

반면 재계는 근로자대표 선출 절차는 법에 명시하되, 사용자 처벌조항이나 근로자대표 상설화, 유급활동 보장에는 반대하고 있다. 정부는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에 근로자대표권을 부여해 통합적으로 근로자대표 제도를 운영하자는 입장이다.

경사노위 5월 내 ‘노사정 합의문’ 추진

각론에서 노사의 입장이 갈리지만, 공익위원들은 합의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제도·관행 개선위 공익위원인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근로자대표제도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처럼 노사 양측 모두 특별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거나 부담스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절충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근로자대표 활동시간 보장이나 상설화 요구는 사용자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문제고, 사용자의 근로자대표 선출 개입시 제재 조항은 현행 근로자참여법에서도 시정명령 조항이 있기 때문에 활용가능하다는 것이다. 근로자참여법 11조(시정명령)에 따르면 사용자가 근로자위원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근로자위원 선출에 개입·방해할 경우 노동부 장관이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고,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5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이승욱 교수는 “사용자의 요구로 노동시간 유연화 협의를 하는데 근로자대표의 활동시간을 유급으로 보장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근로자대표를 상설화하면 매번 사안이 있을 때마다 근로자대표를 선출하는 데 드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노사 모두 90%의 미조직 노동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한 발자국을 내딛는 데 의미를 뒀으면 좋겠다”며 “이달 안에 노사정 합의문을 도출해 21대 국회에서 통과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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