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6년 1월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속 김동삼(1878~1937년) 선생. 국사편찬위원회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일송정 푸른 솔은~”으로 시작하는 가곡 <선구자>의 롤모델이라고 하며, 김좌진·오동진과 더불어 만주지역 민족주의 진영의 대표적 무장투쟁론자로서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일송(一松) 김동삼. 그의 호처럼 척박한 대지에 꿋꿋하게 서 있는 한 그루 소나무처럼 지조와 기개의 한생을 살았다. 그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던 독립운동 진영을 하나로 묶어세우고자 했던 통합운동의 주역이었다. 독립운동의 이념과 전략을 둘러싸고 분파 간의 갈등이 심했던 독립운동 내부의 좌우 어느 쪽에서도 비난을 받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인물로서 통합운동의 구심 역할을 한 거목이었다. 그의 본명은 김긍식(金肯植)이지만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김동삼(金東三)으로 개명했는데 이는 당시 만주지역 길림성·봉천성·흑룡강성을 일컫는 동삼성 독립운동 지도자와 단체들의 단결과 통합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청년 김동삼, 협동학교와 대한협회 그리고 대동청년단 활동

김동삼은 1878년 6월23일 경북 안동군 임하면 내앞마을, 즉 천전리에서 태어났다. 안동지역의 유서 깊은 가문인 의성 김씨 출신으로 김계락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구한말 안동지방의 거유였던 김흥락의 문하에서 구학문인 성리학을 배우며 성장했는데 어릴 때부터 기골이 준수하고 두뇌가 명석했으며 여러 사람을 통솔할 지도력을 가져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이미 소년기에 사서삼경뿐만 아니라 제자백가도 섭렵했으나 감수성이 강한 청년기에 그보다 일곱 살 위인 류인식을 만나 새로운 사조에 눈을 뜨게 됐다.

서울을 왕래하면서 신채호·장지연·류근 등 개신유학자들을 만나 혁신유림으로 탈바꿈한 류인식은 1904년께 안동으로 돌아와 김동삼 등과 만나 근대식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자고 했다. 신학문을 가르치는 신식학교를 설립하는 데에 안동의 보수 유림층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많은 노력 끝에 1907년 3년제 교육기관으로 협동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협동학교는 안동을 넘어서 경북 북부지역 최초의 근대적 사립민족학교였다. 초기에 교장은 류인식, 김동삼은 교감으로 추대됐다.

그러나 1909년 교직원과 학생 30여명이 집단 단발을 하자 보수 유림의 비난의 대상이 돼 급기야 1910년 7월18일 예천지역 의병들이 협동학교를 공격해 교감 김기수, 교사 안상덕, 회계 이종화가 피살되는 참사가 발생했다. 학교가 폐교위기에 몰리자 김동삼을 비롯한 청년 교사들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한편 초기에 반대했던 김대락이 태도를 바꿔 적극적인 후원자가 돼 점차 위기를 벗어나 1911년 3월30일 23명의 1회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었다. 이후 협동학교는 1919년 3·1 운동 당시 안동지방 의거의 중심 역할을 했다.

김동삼은 대한협회 안동지회에서도 활동했다. 안동지회는 1909년 3월에 결성됐는데 이상룡·류인식·김대락 등과 함께 활동했다. 안동지회는 서울과 달리 겉으로는 민중계몽을 표방하면서도 의용병 양성 등 무장투쟁론에 기울었는데 이러한 흐름은 이후 만주 망명과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으로 나타났다.

그는 또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계기로 1909년 10월에 결성된 비밀 결사조직인 대동청년단에서도 활동했다. 신민회가 서울과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반면 대동청년단은 안희제·서상일·이원식·남형우 등 영남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대동청년단은 단원들이 크고 작은 조직 사건에 연루됐으나 1945년까지 명맥을 유지했다고 한다.

만주 이전과 독립군기지 건설

협동학교와 대한협회 안동지회의 주요 인물들은 만주로 이전해 독립투쟁을 할 것을 결의했다. 그들이 가기로 한 곳은 서간도 지역 즉 남만주였다. 1910년 가을 김동삼은 사전조사차 만주를 다녀왔다. 그해 겨울부터 집단 이주가 시작됐다. 먼저 김대락의 가족이 떠나고 이어서 이상룡의 기족이 떠났다. 김동삼은 가족 대신 안동지역 청년 20여명을 데리고 떠났다. 내앞마을 의성 김씨 문중에서 만주로 망명한 사람이 150여명이었다. 가는 길도 고생이었고 기착해서도 고생의 연속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유하현 삼원포였다.

1911년 4월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의 대고산에서 300여명이 모여 노천 군중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민간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했다. 사장에는 이상룡이 추대됐고 김동삼은 조직과 선전을 맡았다. 경학사는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경학사는 경영난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뒤이어서 1912년 6월 부민단을 설립했다. 부민단도 역시 자치조직으로서 김동삼은 여기서 의사부장을 맡아서 활동했다. 통화현 합니하로 본부를 옮겼는데 신흥강습소를 신흥학교로 바꾸고 본격적인 무관을 양성하는 무관학교로 재출발하게 됐다.

그런데 김동삼이 만주지역 독립운동 지도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한 것은 백서농장 장주로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백서농장(白西農庄)을 1914년 길림성 통화현 쏘배차 심산유곡에 건설했는데, 신흥학교 졸업생 1회에서 4회까지 주축이 돼 각 분교·지교에 설치된 노동강습소 등에서 양성한 독립군까지 385명이 모였다. 이름은 농장이었지만 사실상 독립군의 비밀 병영이었다. 백두산 서쪽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백서라는 이름을 붙였다. 농장의 주인이라는 의미에서 장주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독립군 부대 최고지도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직은 군대식으로 편제돼 운영됐다. 자급자족 군대조직이라지만 깊은 산속이라 농사와 작업도 어려웠고 훈련과 교육도 병행하기 힘들었다. 식량을 조달해야 했으나 원활하지 않아 영양실조에 걸리고 질병도 발생했다.

어려움에 직면해 있을 때 국내에서 3·1 운동이 일어나고 만주 각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유하현 삼원포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주지역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의 연명으로 대한독립선언서가 제작 배포됐는데 여기에 김동삼의 이름도 들어가 있다. 1919년 3월13일 부민단을 확대 개편해 한족회가 조직됐다. 김동삼은 한족회 업무 전반을 총괄하는 총무사장이 됐다. 한족회는 독립군을 편성하고 독립전쟁을 수행할 군정부를 건립하려고 했다. 백서농장은 폐지되고 1919년 11월17일 서로군정서가 발족돼 김동삼은 군권을 통솔하는 참모장이 됐다. 서로군정서는 신흥중학을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고 1919년 음력 5월3일 정식 사관학교로 개교식을 했다. 1911년 신흥강습소에서부터 1920년 8월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닫고 주력이 안도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하기까지 3천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신흥학교와 백서농장 출신자, 그리고 뒤이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이후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의열단에도 대거 참여했다.

통합운동의 주역이 되다

김동삼은 1919년 4월10일 상해에서 열린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한 첫 대표자회의에 참석한 29인 중 한 명이었다. 밤을 세워 회의를 한 후 이튿날인 4월11일에 헌법격인 10개조로 구성된 임시헌장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김동삼은 상해에 오래 있지 않고 바로 남만주로 돌아갔다. 그에게는 임시정부보다 그가 했던 핵심 사업인 독립군 양성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다.

갈라진 독립운동진영의 대동단결과 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선 그는 우선 남만주지역부터 통합운동을 하기로 했다. 1922년 1월 남만통일회를 결성해 각자 조직을 해체하고 통합해 대한통군부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대한통군부에 참가하지 않은 단체들이 많았기 때문에 명실상부한 통합은 아니었다. 통합에 더욱 적극적으로 노력한 결과 1922년 8월23일에 군정서·대한독립단·광복군총영 등 71명 대표가 모여 대한통의부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남만주 한인사회의 명실상부한 통합 독립운동 기구가 발족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최고지도자인 총장에 추대됐다.

또한 임시정부 내에서 대립과 분열이 심해지자 안창호가 제안한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서로군정서를 대표해 상해로 갔는데 1923년 1월 시작된 회의에는 국내·만주·중국·노령(러시아령)·미주 등지에서 온 135개 독립운동단체, 150여명 대표가 모였다.

김동삼은 1월18일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됐다. 개조파와 창조파로 맞서 통합의 실마리는 열리지 않았다. 파국을 막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해결의 기미가 없자 서간도 지역에서 대표를 소환함으로써 의장직을 사임하고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국민대표회의 결렬을 보고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통합이 절실함을 깨닫고 이에 뛰어들게 된다. 그러한 일환으로 정의부를 결성했고 이어서 만주 내에 있는 참의부와 신민부까지 통합하기 위해 삼부통합회의를 제안했다. 1928년 4월 북만주의 신민부를 방문하고 “광복의 제1요인 혈전의 숭고한 사명 앞에는 각개의 의견과 고집을 버려야 할 것이며, 독립군이 무장하고 입국하여 광복전(光復戰)을 수행하기 전에 3부의 군부가 합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합작은 지상명령이니 여하한 장애가 있더라도 합작해야 한다”고 하면서 3부의 통합을 강력히 주장했다. 가히 통합의 화신이요 구심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3부 통합은 쉽게 되지 않았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통합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하는 와중에 밀정에 의해 하얼빈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고 평양감옥을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돼 복역 중 순국했다. 1937년 4월13일, 그의 나이 만 59세 때였다.

노세극 4·16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그의 장례는 만해 한용운이 주선했다. 자신의 거처인 성북동 심우장으로 김동삼의 유해를 옮기고 5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한용운은 영결식에서 방성대곡했다. 그가 일생에서 눈물을 흘린 적은 이때 한 번뿐이었다고 한다. 한용운은 “유사지추가 도래하면 이분이 아니고는 대사를 이루지 못한다. 일송을 잃은 우리 민족은 큰 불행이고 손실”이라고 했다.

김동삼은 옥중 유언을 남겼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그의 유골은 유언대로 화장돼 한강물에 뿌려졌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