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박상희 선생(1905~1946)


경북지역 사회주의 3인방 중 한 명인 박상희(朴相熙)는 박정희의 셋째 형이다. 그는 1905년 8월12일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에서 태어났다. 박정희는 박상희가 태어난 후 1914년 선산으로 이사해 태어났다. 그는 8남2녀 중 4남이었다. 첫째는 두 살 때 사망했고 둘째는 박동희, 셋째는 박무희였다. 그리고 넷째는 누나 박귀희였으며, 다섯째가 박상희다. 그리고 아래로 남동생 박한희(13세 때 사망)와 박정희, 여동생 박재희가 있다.

박상희는 황태성·임종업과 달리 경북을 벗어나지 않은 토박이 운동가였다. 그는 1920년 구미보통학교에 입학해 1925년 졸업한다. 스무 살 되던 해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다. 박정희의 여러 기록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했으며, 식구도 많아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어렵게 학업을 마친 박상희는 1920년대 후반 들어 동아일보와 중외일보(후일 ‘조선중앙일보’) 그리고 조선일보 기자와 선산지국장을 맡게 된다.

이 시기 각 신문사의 조선인 기자들은 시·군 단위별로 ‘기자단’이라는 친목모임을 꾸리고 있었다. 경북지역에는 이 시·군 단위의 모임들이 모여 ‘경북보도협조망’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경북보도협조망’을 조직한 목적은 무엇보다도 항일운동 소식을 신속히 전달하자는 것이었다. 즉 한 신문사 기자가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취재하면 자신이 속한 신문에만 싣는 것이 아니라 경북보도협조망을 통해 다른 신문사 기자들에게도 알려 가급적 여러 신문에 기사가 실리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선산에서는 박상희와 최관호 등이 활동했다.

가난한 만학도 언론인으로

1928년 1월8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경북지역 신문기자 80여명이 모인 가운데 홍보용의 사회 아래 김천청년동맹지회 회관에서 ‘경북기자대회’를 개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김천기자단의 황태성도 경북기자대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김천기자단에 속한 황태성과 선산기자단에 속한 박상희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1917년생인 박정희는 “보통학교 시절에 황태성이 형과 함께 집에 자주 찾아왔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황태성의 소개로 경북지역에서 신간회·공산청년동맹·지역소비조합 운동 등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선산지역의 활동을 담당하게 된다.

일단 일제강점기 1927년 5월17일 종로경찰서 형사가 작성한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 참가자 명단’에 경북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참석한 박상희 이름이 등장한다.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는 공식적으로는 ‘사상·청년·노동·농민·여성·형평 등 사회운동 전체에 관한 이론과 정책을 수립하고, 사회운동 각 부문 간의 상호 연계 및 조직을 확충할 목적’이라고 발표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협의회의 창립준비위원회는 1926년 2월17일 결성됐고, 이후 1년간의 활동을 한 뒤 1927년 5월16일 정식 출범했다. 당시 일제 경찰은 이 단체가 1차 공산당 사건 이후 관련자들이 재조직한 단체로 파악하고 있었을 만큼 조선 공산주의계열의 단체를 망라한 조직이었다.

1920년대 말 박상희는 선산청년동맹의 준비위원과 상무위원을 겸직하고, 1928년 집행위원직으로 올라간다. 1927년 2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결집해 결성한 신간회 창립 후에는 신간회 간부로 항일활동에 앞장섰다.

“신간 청총(조선청년총동맹) 해소를 논박한 팜프레트(팸플릿) ‘우리의 전술’ 이란 것이 선산청년동맹위원장 박상희군에게 우편으로 온 것을 선산경찰서 구미경찰관주재소에서 지난 12일에 압수하였다.”(동아일보 1931년 4월2일)

그는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되자, 1934년 항일민족지 ‘조선중앙일보’에 입사해 대구지국장을 맡는다. 이듬해 1935년 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옮겨 활동했다. 박상희는 독립운동으로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는 일이 잦았다. 1928년에만 7월11일과 11월11일 두 차례 검거돼 조사를 받았다. 그래서 이를 지켜본 동생 박정희는 순사보다 더 높은 지위를 가진 군인이 돼 형을 잡아간 순사를 혼내 주려 했다는 엉뚱한 이야기도 있다. 1927년 12월20일 동아일보에는 선산군 청년동맹 창립준비위원회 집행위원장 박상희와 관련된 기사가 보인다.

황태성 중매하자 선도 안 보고 결혼

박상희는 이렇게 20대 초반 나이에 이미 전국적인 항일운동 속에서 지역 항일운동을 어떻게 펼쳐야 할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즉 일부 뜻있는 사람들만 나서서는 독립을 이룰 수 없으며, 대중적인 참여로만 독립이 가능하다고 봤던 것이다. 그 일환으로 1931년 4월29일 구미소비조합 분란을 수습하기 위해 박상희가 신임 역원을 맡은 것이다.

김천에서 전국 최초로 신간회 지회를 결성했던 황태성의 영향을 받아 박상희도 선산에서 신간회와 사회주의 계열 청년동맹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러한 이념적 동질감 외에 인간적인 친분도 밀접했다. 1961년 ‘황태성 사건’에 연루돼 서울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한 황태성의 조카사위 권상능은 “황태성이 조귀분을 신부감으로 중매하자 박상희는 선도 보지 않고 결혼식 날짜를 잡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그럴 정도로 서로가 신뢰하는 사이였다. 결혼 후 박상희가 황태성에게 엽서를 보내왔는데 ‘결혼식 때 처음 봤는데 아주 추녀더라’고 농담을 적었다고 들었다. 그럴 정도로 황태성과 박상희는 허물없는 사이라고 들었다”고 증언했다.

박상희는 1929년 4월19일 조귀분과 결혼했다. 조귀분은 김천의 유지인 한양 조씨 집안 조길수의 딸로 당시 김천 금릉회관에서 황태성의 여동생 황경임과 같이 활동하면서 야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조귀분은 항일여성독립운동 단체인 근우회 부회장과 김천지회장을 역임했다. 박상희·조귀분 부부는 훗날 김종필과 결혼하게 되는 큰딸 박영옥을 낳아, 박정희는 김종필을 조카사위로 두게 된다. 그리고 두 부부는 영옥 외에 이후 딸 넷(계옥·화자·금자·설자)을 더 낳았고, 박상희가 사망한 다음 해인 1947년에 유복자 준홍을 낳았다. 한데 준홍의 본래 이름은 ‘재복’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재복은 남로당의 군사총책이었으며, 박정희를 남로당에 가입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상희는 그의 이름를 따 박재복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들 박준홍은 아버지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대구 계성고등학교와 경희대 정외과를 졸업한 후, 6월 항쟁 직후 1988년에 치러진 13대 국회의원선거에는 민정당 후보로 구미에서 출마했으며, 1995년 1대 지방자치선거에는 경북도지사로도 출마했다. 또 2004년 17대 총선에서는 자민련 후보로 출마했다. 하지만 모두 낙선하고 말았다. 현재 부친 박상희의 사회주의 경력은 지운 채 독립운동 훈포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대해 큰딸 박영옥은 2010년 7월15일 구미 박상희 묘역에서 열린 추모비 제막식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63년 전 돌아가신 아버님은 동분서주하시면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수많은 옥고를 치르셨고, 돌아가시던 1946년 10월5일에도 시위대에 둘러싸인 경찰관이 위태롭다는 전언을 듣고 경찰관을 구하러 가셨다가 변을 당하셨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아버님은 좌익이니, 우익이니, 공산활동을 했느니 하는 부당한 평가에 시달리며 지금까지 지내 왔다. 별세하신 지 60년이 지나도록 묘비 하나 없이 싸늘한 땅에 누워 계셨다.”

황망한 죽음, 사회주의운동 이력 지우는 아들

박상희를 비롯한 3인방은 독립운동 훈포장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하지만 훈포장을 위해 그들의 삶이 왜곡돼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8·15 해방 직전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참여하고 마침내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를 창설했고, 구미인민위원회 내정부장을 맡는다.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에 선산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했다.

1946년 10월 대구인민항쟁 발발의 가장 큰 원인은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에 있었다. 그래서 10월1일 대구인민들의 시위를 ‘기아 데모’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10월 인민항쟁 당시 미국정은 대구·경북지역 남로당원들이 ‘폭동의 배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북지역 남로당원들은 폭동이 최악의 사태로 치닫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것은 박상희(朴相熙)의 죽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지부 사무국장이던 박상희는 구미에 머물면서 대구의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해 10월3일 시위를 하던 인민들이 선산경찰서를 습격하자, 박상희는 시위대를 설득해 갇혀 있던 경찰들을 무사히 피신시켰다.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10월6일 우익 청년들이 경찰과 함께 선산경찰서를 점거하고 있던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자, 박상희가 다시 중재를 나섰다가 그만 경찰이 발포한 총알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대구에 있던 황태성도 마찬가지였다. 시위대와 경찰의 대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녔다. 하지만 자신들의 오류를 감추고 폭동의 배후를 남로당으로 지목한 미군정은 황태성에게도 수배령을 내렸으며, 이를 피해 황태성은 월북하게 된다.

박상희의 시신은 대구에 살고 있던 여동생 박재희의 남편 한정봉이 수습해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렇게 경북사회주의 3인방의 독립운동과 민족자주국가 수립에 헌신했던 위대한 삶은 덧없는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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