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녀투강유적기념관 내 안순복 선생(1915~1938) 사진. <세계한민족문화대전>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일제 강점기 민족해방을 위한 항일대전에는 수많은 여성전사들의 붉은 피가 스며 있다. 중국 목단강시 우스훈강가의 항일 팔녀투강(八女投江) 기념비에서 조선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오른손에 총대를 움켜쥐고 적들을 무섭게 돌아보는 안순복도 그중 한 사람이다.

1938년 10월 1천여명의 일제와 괴뢰 만주국 군대에 맞서 처절한 격전을 하다 마지막까지 적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차디찬 우스훈강으로 뛰어들어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팔녀투강의 영웅들이 있다. 정지민·호수란·양귀진·곽계금·황귀청·이봉선·왕혜민·안순복, 투강한 항일 팔녀 중에서 안순복과 이봉선이 조선인이었다.

혁명적 가정에서 구국소년단 활동

안순복은 1915년 흑룡강성 목릉현 신안툰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926년 12세 때 한형도·김찬·장한필 등 당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당원들이 마을에서 조선구국 청년회·부녀회·소년단 등 반일 지하 혁명조직을 건설했다. 여기에 안순복의 아버지 안덕인, 큰오빠 안일산, 둘째 오빠 안광섭이 참여했다. 이런 혁명적 가정에서 성장해 자연스럽게 항일정신을 가지게 됐으며 소년단원이 돼 반일 표어를 붙이고 반일전단을 뿌리는 등 선전활동에 참가했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1931년 9·18 만주사변 이후 정세가 몹시 악화됐다. 일본군이 심양·장춘·할빈 등지에 침입했고 1932년 5월 말~6월 초 영안·목단강·해림 등지도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이에 지하당은 항일유격대를 조직하고 적들과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1933년 1월 일본군이 목릉으로 쳐들어오자 항일유격대는 마도석·대마하 일대에서 접전을 벌여 많은 적을 살상했다.

이 전투 성과에 힘입어 1933년 1월4일 이연록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유격총대’가 결성되고 1월 하순 ‘동북항일구국유격군’으로 재편됐다. 이는 1936년 3월 동북항일연군 4군으로 개칭되고, 1940년 2월에는 다시 동북항일연군 2로군에 편입됐다. 안순복은 19세 때인 1933년 2월 동북항일구국유격군 4퇀 정치위원 박덕산과 결혼했다.

안순복의 남편 박덕산은 1933년 밀산항일유격대 입대 이후 동북항일동맹군 4군 1사 2퇀에 배속돼 유격전을 전개했다. 1934년 12월~1935년 1월 말 지방 당조직과 협력해 밀산·벌리·액목 3개 현의 접경지역에서 항일구국회 47개를 조직했다. 박덕산은 동북항일구국유격군 4퇀 정치위원을 맡아 전투 지휘와 정치사업을 도맡았다.

아버지·오빠, 일제 토벌에 희생 후 항일유격대 참가

1932년 3월 일본 헌병대가 안순복이 사는 신안툰의 지하조직을 파괴하려고 30여명의 마을 사람들을 붙잡아 갔다. 안순복의 아버지와 둘째 오빠 등 7명을 생매장했고 50호밖에 안 되는 신안툰 마을도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그 후 일제의 토벌로 부모 형제와 삶의 터전을 잃고 원한에 사무쳐 복수에 피를 끓이던 안순복은 결연히 어머니를 남겨 두고 남편 박덕산을 찾아 항일유격대에 참가했다.

당시 항일유격 근거지에 대한 일제의 토벌이 너무나 혹심해 항일유격대는 소부대로 편성해 신출귀몰하게 적을 타격하는 전략전술을 구사했다. 안순복은 그때 이미 임신한 몸이라서 소부대를 따라 기민하게 행동하기 어려웠기에 고산촌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1935년 6월 안순복의 남편 박덕산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불행히 희생됐다. 아직 뱃속 아이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남편이 먼저 전사한 것이다. 그런데도 안순복은 남편을 잃은 슬픔을 일제를 향한 분노로 승화시키며 철천지원수 일제와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다.

삼복철 어느 날 일제 수비대 10여명이 고산촌 동쪽 소석하 기슭에서 총을 벗어 놓고 목욕하는 틈을 타서 안순복과 몇몇 부녀회 여성들이 총 몇 자루를 훔쳐 쥐도 새도 모르게 잠적했다. 미쳐 날뛰는 적들의 대수색이 지난 깊은 밤 안순복은 지하조직의 도움을 받아 왜놈들의 총과 군복을 가지고 동북항일동맹군 4군에 무사히 돌아왔다. 총지휘 이연록은 안순복의 부대 귀환 소식을 듣고 “고려 여성의 본보기”라고 치하했다. 그해 초가을 안순복은 깊은 산중의 항일부대 밀영에서 딸을 낳았다.

1936년 동북항일연군 4군으로 개칭된 부대는 안순복을 피복공장 책임자로 임명하는 동시에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받아들였다. 피복공장에는 10여명의 여성과 4명의 남성이 있었는데 손재봉틀 3대로 그 많은 군복을 만들었다. 일본군과 경찰·특무들의 끊임없는 수색·토벌 때문에 부대는 항상 자리를 이동해야 했다. 그때마다 안순복은 아이를 업고 재봉틀을 이고 동지들을 거느리고 산과 령을 넘나들면서도 잠깐의 휴식시간에는 재봉틀을 돌려 군복을 지었다.

▲ 팔녀투강비.<세계한민족문화대전>


동북항일연군 4군 피복공장 책임자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을 조작해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후방을 공고히 하기 위해 삼강지구에 대한 토벌을 강화했다. 1938년 중국공산당 길동성위원회에서는 4군과 5군이 8군·9군과 연합해 오상·서란 방면으로 진군해 항일연군 1로군 3군과 함께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할 것을 결정했다.

안순복 등 9명의 여성전사는 어린애가 딸려 있어 부대를 따라 움직이기가 불편해 부대 지휘부는 아이들을 밀산현의 한 농민집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안순복 등 3명의 여성이 아이들을 맡긴 후 부대로 돌아왔는데, 마을 사람들은 안순복이네를 “자식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는 여호걸”이라고들 불렀다. 훗날 그때 맡겼던 아이들 중에서 한 명만 찾고 나머지는 행방불명됐다고 한다.

1938년 5월 동북항일연군 4군과 5군은 서정을 시작했다. 일제는 수많은 병력을 동원해 항일부대의 전진을 가로막고 폭격을 가해 댔다. 아군의 손실이 커서 5군의 주력은 10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부녀퇀은 안순복·랭운 등 8명에 불과했다. 10월 하순 안순복이 소속된 5군 1사 부녀퇀은 주력부대를 따라 임구현 경내의 우스훈강가에 이르렀다. 부대는 그곳에서 모닥불을 피워 노숙하고 이튿날 새벽에 강을 건너기로 했다.

주력부대 구하려 유인작전 지휘

그런데 그날 밤 양자구의 특무 갈해록이 모닥불을 발견하고 일본군 수비대에 고발했다. 일본군과 위만군 1천여명이 즉각 출동해 항일부대의 숙영지를 삼면으로 포위하고 새벽에 강을 건너려는 항일부대 주력을 향해 습격을 시작했다. 주요 진지와 1.5킬로미터 떨어진 우스훈강 옆 버들 숲에 매복해 있던 여전사들은 이처럼 위급한 상황에서 적들을 끌어들여 주력부대를 무사히 이동시키기로 하고 즉시 유인작전을 개시했다.

안순복의 사격명령과 동시에 여전사들의 총탄이 적을 향해 날아갔다. 강변에서 총소리가 울리자 일본군은 항일부대의 주력이 강변에 있는 줄 알고 다수의 병력을 그쪽으로 내몰았다. 적들이 여전사들에게로 일제히 쏠려 가는 사이에 주력은 포위를 돌파하고 재빨리 이동했다. 그러나 그 후 살펴보니 8명의 여전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그들을 구출하려고 원래 지점으로 돌격해 나가려 했을 때는 이미 적들이 완전히 통제해 치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스훈강가에서는 단지 8명의 여전사가 수백 배 많은 적들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에서 탄알마저 다 떨어졌다. 점차 포위망을 좁혀 다가드는 적들을 지척에 둔 여전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울부짖으며 세차게 흘러내려 가는 우스훈강을 돌아다봤다.

“동지들, 우리는 포로가 될 수 없습니다. 적들이 우리를 쏴 죽이게 가만있을 수도 없습니다. 날 따라 함께 강물에 뛰어듭시다!” 안순복의 이 말에 마지막 남은 수류탄 한 개를 던져 적병들이 엎드린 틈을 타서 여전사들은 나란히 손을 잡고 강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적들은 30미터 사이의 강심에 있는 여전사들에게 기관총과 박격포를 마구 쏘아 댔다.

나를 따라 함께 강물로…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민족의 딸이며 불요불굴의 전사인 안순복과 그의 전우들은 고귀한 청춘과 목숨을 민족해방 성업에 장렬히 바쳤다. 희생될 때 안순복은 24세였다. 또 한 명의 조선 여성전사 이봉선은 겨우 20세였다. 17세 때 동북항일연군에 들어가 선전·정찰 활동을 펼치고 일본군 250명을 사살한 ‘흑할자요 저격전’에서 전투병으로 참전한 이봉선은 안순복을 포함한 나머지 7명의 여성전사들과 함께 이렇게 산화했다.

1986년 9월7일 여덟 영웅을 기념하기 위해 ‘팔녀투강’ 기념비가 세워졌다. 화강암으로 된 기념비는 높이 13미터, 길이 8.8미터로 기념비를 세우고 받침대에 등영초(주은래 부인)가 ‘八女投江’ 휘호를 쓰고 정협 부주석 강극청은 “여덟 여영웅의 영령은 영생불멸하리”라는 제자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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