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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68] 김일성부대의 국내 전권대표, 박달

기사승인 2020.07.27  08: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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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 1938년 9월22일 일본 경찰에 체포된 박달(사진 오른쪽) 선생. <한국학중앙연구원>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1945년 8월15일 광복 직후 서대문형무소에서 하반신이 마비된 채 업혀서 나온 독립투사가 있다.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김일성부대=동북항일연군 2군 6사)와 연계를 맺고 1930년대 중반 이후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이던 조국광복회의 국내 지역조직으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만들고 1937년 6월 보천보 전투에 합세한 박달이 바로 그다. 항일빨치산의 국내 진공을 당한 일제는 이른바 ‘혜산 사건’을 조작해 739명을 검거하고 188명을 구속했다. 박달도 수배 중에 친일경찰 최연에게 체포되고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됐으나 일제의 야수 같은 고문으로 결국 일어나 걷지 못하는 몸으로 광복을 맞았다.

축구회부터 어용단체까지 활용, 일제의 경계 허물기

박달은 1910년 10월28일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박문상(朴文湘)이다. 부친은 길주 바로 옆의 동해안 북부 명천에서 정어리공장을 운영했는데 박달을 상급학교에 보내지 않고 보통학교 졸업 후 16세 때부터 이 공장의 회계를 맡아 보게 했다. 그러나 박달은 독학으로 중학 강의록을 다 읽고 1920년대 신사조와 관련한 많은 서적을 탐독했다. 또 그는 11세 때 조혼했는데, 다섯 살 많은 아내에게 한평생 변함없는 순정을 바쳤다. 첩을 둔 아버지로 인해 고독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안타깝게 지켜봤기에 더욱 그랬다고 한다.

박달은 명천소년회에 참여하면서 사회활동을 시작했고 20세 무렵 갑산군으로 이주해 갑산청년동맹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35년에는 박금철·이효순·허학성 등과 함께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직했다. 당시 갑산지역의 일부 사회운동자들은 일제의 폭압에 겁을 먹고 투항주의적 태도를 보였는데, 박달은 혁명에서 도피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갑산의 자발적 운동을 조직화해야 하고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갑산공작위원회를 보호하기 위해 하부조직 명칭을 일부러 정우회·전진회·반일회 등으로 지었다. 진흥회·자위단 등 어용단체들도 활용했다. 이런 간판으로 야학회·운동회·축구회 등을 개최해 일경의 주목을 따돌리고 대중계몽을 추진했다. 월 1회 갑산공작위원회 회의도 축구대회에서 했고 회원모임도 제사·결혼·생일·환갑잔치에서 가졌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의 폭압적 현실에서 합법 활동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제 경찰, 친일 주구들과의 관계를 좋게 하고 어용단체·말단행정기관에 들어가 활동했다.

갑산공작위원회 총책임자 겸 정치부 책임자를 맡은 박달 자신이 직접 보천면 신흥리 1구의 농촌진흥회 부회장, 자위단 부단장, 운흥면 소방수 등 주요 자리를 차지하여 일제의 경계를 늦추고 정보를 취득하며 동조자를 포섭했다. 훗날 혜산 사건 1차 구속자 중 63명이 자위단원이었을 정도로 합법-비합법을 결합해 농촌의 실정에 맞는 소작료 인하, 화전 자유 개간, 부역 반대, 고리대 반대, 아마 강제재배 반대 등의 요구와 투쟁을 힘 있게 벌였다.

김일성을 만나다

1936년 5월5일 동강회의의 조국광복회 결성 이후 조선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 2군 6사) 사령 김일성은 선전과장-조직과장 권영벽을 파견해 1936년 10월 장백현에서 최초의 조국광복회 조직인 20도구 신흥촌지회(지회장 이제순)를 결성했다. 다시 이제순이 조국광복회 국내조직화 최적임자로 추천한 박달을 만나기 위해 권영벽은 김일성의 편지를 간직한 채 그해 12월 압록강을 건넜다. 이제순도 동행했다. 권영벽을 통해 박달에게 보낸 김일성의 편지는 아래와 같다.

“조국을 사랑하며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는 국내의 애국자동무들 앞

국내에서 간악한 일제 원수들과 싸우는 동무들! 우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무장을 들고 만주광야에서 일만군경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무들과 손을 굳게 잡고 모든 힘을 합쳐서 일제를 반대하며 조국을 광복시키는 투쟁을 진행할 것을 충심으로부터 권합니다. 나는 우리의 대표를 직접 동무들에게 파견하오니 서로 만나서 사심 없는 토론들을 교환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달은 권영벽을 통해 조선인민혁명군의 주요 활동과 조국광복회 창립 소식을 전해 듣고 김일성 사령의 편지를 읽은 다음 기뻐하며 즉시 만나게 해 달라, 언제든지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순이 박달을 데리고 백두산 밀령으로 가서 김일성을 처음으로 만났다. 논의는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으로서 조국광복회 국내 지역조직 건설과 국내당공작위원회를 통한 당 조직 건설에 집중됐다.

박달의 질문과 김일성의 답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박 : 조선인민혁명군은 중국군대가 아닌가?
김 : 자주성과 독자성이 보장되는 항일연합군이다. 중국사람들이 많은 동네에서는 항일연군으로, 조선사람들이 많은 동네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이름으로 활동한다.
박 : 조국광복회에 최고강령이 왜 없는가? 민족주의로 후퇴한 것 아닌가?
김 : 조선독립은 공산주의자들만으로 안 된다. 각계각층의 모든 역량을 묶어 세워야 한다. 조선독립 없는 공산주의가 가능하지 않다. 적색을 내세워 단결을 저해하면 안 된다.
박 : 당 조직을 건설하면 국제당에 승인을 받아야 하지 않는가?
김 : 마르크스·레닌은 누구의 승인을 받고 당 조직을 건설했나? 당 중앙이 건설될 때까지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국내당공작위원회를 통해 기층 당 조직을 건설하고 통일적으로 지도한다.
박 : 당 조직을 먼저 건설해야 하나? 대중단체를 먼저 건설해야 하나?
김 : 당원의 준비에 따라 당 조직 먼저, 또는 대중단체 먼저 건설할 수 있다. 준비된 당원이 3명만 돼도 당 조직을 먼저 만든 후 대중단체를 건설할 수 있다. 준비된 당원이 1명이면 대중단체를 먼저 만들어 그 속에서 당원들을 육성해 당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그 결과 조선인민혁명군 당 위원회의 국내 전권대표이자 국내당공작위원회 위원으로서 1937년 1월 박달의 사회로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개편하고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채택했다. 산하에 항일청년동맹·반일그룹·농민조합·반일정우회 등 35개 단체가 조직됐다. 갑산·혜산·삼수 등의 백두산 주변 접경지역, 무산·성진·길주 등 함북의 조중 국경지역, 함남 함주·함흥·풍산·단천·흥남·원산, 평북 명천·신의주와 압록강 중류 방면의 동흥·후창 등에도 조직사업이 이뤄졌다.

민중에게 자신감 안겨 준 보천보 전투

1937년 5월 박달은 김일성을 또 찾아가 만났다. 김일성은 일제가 머지않아 중일전쟁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전제 아래 국내 혁명가들이 조성된 정세를 잘 이용하면서 반일투쟁을 적극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천보 시가의 약도를 그리고 일제의 국경경비를 상세히 조사해 보고하는 특별과업을 주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갑산공작위원회의 협력으로 1937년 6월3일 밤 압록강을 건너 이튿날 정각 10시 지휘처의 권총 발사를 신호로 보천보 전투를 개시해 승리로 이끌었다. 혜산진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보천보의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 등 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며 반일연설 이후 신속히 퇴각했다.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국내 주요신문과 세계 각국의 언론들이 일제히 보천보 전투 소식을 전했다. 일제가 1936년 12월 노동운동가 이재유 체포를 대서특필해 더 기죽어 있는 노동자·민중들에게 조선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보여줬고 싸우면 반드시 독립과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 줬다.

1937년 7월7일 중일전쟁을 통한 중국본토 침략 코앞에서 보천보 전투로 급소를 찔린 일제는 혜산·장백 일대에서 그해 10월부터 대규모 검거에 나섰다. 1938년 7월 시작된 2차 검거까지 공식 발표만으로 무려 739명이 붙잡혔다. 권영벽도 10월10일 혜산에서 석유를 구입하다가 일찍이 체포됐다. 일제는 박달 등 조선민족해방동맹의 핵심들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혜산경찰서의 조선인 경부 최연이 사복경관·자위단·소방대까지 다 끌어내 박달의 뒤를 추적했다.

1차 검거 선풍 속에서 박달은 다행히 몸을 피했다. 함경남도의 평야 지대와 각 지역의 노동시장에서 활동하면서 겨울을 넘긴 뒤 1938년 4월 하순 갑산군에 있는 산중 아지트로 돌아와 검거되지 않은 회원들을 다시 모아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조국광복회에 대한 일제의 2차 검거가 시작되자 6월 초 장백현 19도구로 강을 건너 다시 피신한다. 같은해 8월20일 아지트로 돌아와 머물러 있던 중 그만 체포됐다. 2차 검거로 구속된 관계자는 279명이었다.

박달과 김철억은 김철억의 사촌형 김창영의 변절로 1938년 9월과 10월에 체포되고 말았다. 일제는 박달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고문을 했다. 심문의 초점은 조선인민혁명군의 위치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성원명단이었다. 척추가 부러지고 다리뼈가 부서졌다. 그러나 그 어떤 고문과 악형도 박달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처음에 사형을 선고했다가 증거 부족으로 무기징역으로 바뀌었다.

박달은 만 7년의 옥고를 이겨 내고 서대문형무소를 나왔다. 권영벽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선전과장-조직과장, 이제순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 위원장이 1945년 3월10일 오후 4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최후를 마친 지 155일 만이다. 박달이 아내의 간호를 받으며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하고 있는데, 김일성이 북조선임시인민위 사무국장을 보내 평양으로 데리고 갔다. 자신의 집 옆에 박달의 집을 잡아 주고 그를 소생시키기 위한 치료대책을 세웠다. 전쟁 이후에는 주을휴양소에 ‘박달각’을 따로 지어 그를 치료해 줬다.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박달은 아내 현금선과 의사들의 협조로 수기 <조국은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 자서전적 장편소설 <서광>을 쓰기 시작했다. 수많은 독자들이 독후감과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에 고무돼 여러 편의 글을 더 써 냈다. 그러나 그의 병세는 날로 악화돼 1960년 4월1일 운명했다. 박달의 집에서 전례가 없는 조선노동당 중앙위 정치국회의를 열고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결정했으며, 당시 김일성 수상이 직접 박달의 관을 메고 운구했다. 박달이 해방 전에 거주하던 보천군 운흥리 집을 원상태로 복구하고 집 앞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박달은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 4번째 단상에 안치돼 있다.

정성희 labortoday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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