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틈틈이 내가 겪은 투쟁의 이면에 담긴 역사를 날것대로 복기하려 한다. 호명되는 조직·개인은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중 일부는 신경질 낼 것이다. 불편한 역사를 끄집어 낸다는 힐난도 있을 것이다. 기억 공방도 벌어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만신창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시작한다. 최근 논쟁 과정에서 처참하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다.

노사정 합의를 둘러싼 초기 풍경은 아수라장이었다. 반대파 일각은 물리력을 썼다. 찬성 의견을 향해 쌍욕과 비아냥도 퍼부었다. 노동운동 민주주의의 후퇴였다. 내부 폭력에 단호하지 못한 탓이다. 논쟁 과정에서 투쟁의 한계를 국민파-중앙파에 전가하는 글을 봤다.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민주노총 역사는 긴 시간에 걸쳐 사안·상황·정파·인물 등이 얽히고설켜 만든 복잡다단한 과정의 연속이다. 일방이 공을 독차지하거나 상대에게 과를 전가할 수 있는 간단한 성질의 역사가 아니다. 한때 민주노총은 국민파-중앙파-현장파, 세 축 정파가 운동을 대표했다. 모두 열심히 투쟁했고, 저마다 공과가 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제 잘못은 얼버무리고 상대 잘못만 부각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 더는 방관하지 않으려 한다. 한편, 당대 역사는 기록의 약점을 살아 있는 기억으로 보완할 수 있다. 그러나 후대 역사는 오롯이 기록에 의해 평가된다. 후대 역사 측면에서 편파적 기록을 방관하는 것은 역사 왜곡에 동조하는 것이다.

나를 방어하려 한다

최근 논쟁 과정에서 깊은 내상을 입었다. 나는 현장파 또는 자칭 좌파라는 단위의 공식 글들을 통해 손모가지를 끊어야 하는 자본의 앞잡이에 투항의 바이러스가 됐다. 바람을 타고 온갖 쌍욕도 실려 왔다. 앞으로도 나는 중심부 대 주변부로 갈라진 노동 분단의 해소를 통한 노동계급 구축 방안으로 사회연대전략을 계속 밀고 갈 것이다. 긴 일상의 시대, 기·승·전·투쟁만으로는 계급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얘기할 것이다. 자본의 앞잡이라는 비난이 심해질 것으로 예상한다. 나는 내 운동이 그렇게 평가당한 채 딸에게 전달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에 몸서리친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에 가고 싶다며 수학학원 하나만 보내 달라고 1년간 울며 조르다 결국 공부동냥을 해야 했던 하나뿐인 딸은 아빠가 자신을 뒷받침하지 못한 것은 세상을 좀 더 평등하게 바꾸려 그랬던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 딸이 훗날에 아빠 삶을 들춰 보는데, 자본의 앞잡이로 기록돼 있다면 얼마나 상심할지, 지금의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려 노력할 것이다. 지금의 나는 어떤 정파 소속도 아니다. 10년 넘었다. 그런데도 늘 중앙파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정파 시대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로 강렬했던 정파 갈등과 역할 때문이다.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 명칭은 1998년 탄생했다. 관련 내용은 레디앙의 ‘중앙파-국민파-현장파의 기원’을 참조하면 된다. 이름이 생기니까 흐릿하던 경계가 선명하게 구별되고 경쟁도 심해졌다. 그즈음의 한 일화다.

현장파가 지휘권을 받아 가다

괄호 안 정파 구분은 당시 기준이다. 전투경찰·최루탄 대 선봉대·화염병의 시대였다. 서로 쇠파이프도 휘두르고 짱돌도 던졌다. 노동운동의 가투(가두투쟁)는 금속연맹 대오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금속이 젊고 팔팔하던 시절이었다. 담당은 나였고, 전노협부터 금속연맹까지 선봉대 담당으로 노동운동 야사(야전사령관) 역할을 했다.

1999년 5월1일, 민주노총 주최 전국 집중 세계노동절대회가 서울역에서 진행됐다. 집회 뒤에 명동성당까지 행진했다. 행진 중 금속과 경찰의 충돌이 있었고, 나는 가벼운 수준에서 마무리했다. 5월12일로 예정된 금속 파업, 이어 13일부터 15일까지 진행될 1만 상경투쟁을 앞두고 현장 간부가 연행·구속되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금속연맹 1만 상경투쟁은 주 40시간 노동제 투쟁의 서막을 여는 중앙파의 야심 찬 기획이었다. 당시 법정노동시간은 주 44시간으로 토요일 오전까지 근무였다.

며칠 뒤, 민주노총 조직실 신○○(현장파)가 나에게 말했다. 노동절에 싸우려 했는데 금속이 받쳐 주지 않았다고 하면서, 상경투쟁 때 민주노총이 결의대회를 하고 싸움도 할 거니까, 가투 지휘권을 달라 했다. 그 뒤에도 현장파 여럿이 지휘권 운운했다. 또 며칠 뒤였다. 금속 위원장 문성현(중앙파)은 나를 불러, 민주노총 위원장 이갑용(현장파)이 지휘권 얘기를 했다면서 한번 넘겨 보자고 했다. 나는 버티다가 거듭되는 설득에 따랐다.

상경투쟁이 진행됐다. 전체 상황은 참세상의 ‘금속산업연맹, 총파업 돌입하고 2박3일 상경투쟁 전개’를 참조하면 된다. 5월14일, 둘째 날이었다. 대학로 집회가 끝나고 행진이 시작됐다. 금속 대오는 기세등등하게 종로통 전 차선을 먹으며 행진했고, 종각에 이르렀다. 예상대로 전투경찰이 배치됐다. 종각은 경찰의 마지노선이고, 어떤 대오도 뚫은 적이 없던 종로통 싸움의 최전선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약속대로 민주노총 집행부에 지휘권을 넘겼다.

민주노총은 작은 방송차를 놓고 집회만 했다. 앞 대오만 들을 수 있는 수준의 용량이었다. 그렇게 1시간가량, 대오에서 욕이 터졌다. 앞 대오는 쌍용자동차였다. 뒷 대오에서도 아우성친다는 연락이 속속 전달됐다. 싸우든 말든, 집회를 이제 그만하라는 요구였다. 그때 민중가수 최도은이 방송차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다급해진 나는 이갑용과 박○○, 고○○, 김○○, 신○○ 등 민주노총 내 현장파 집행부를 찾았고,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사이 노래가 끝났다. 이번엔 누구도 마이크를 잡지 않았다. 씨X 관둬, 나는 격하게 내뱉고 대오 앞으로 나가 구호를 선창했다. 곧바로 대오를 일어서게 했고 빠르게 돌격 앞으로 했다. 지휘권이 민주노총 집행부로 넘어간 것을 알고 있던 경찰은 집회만 하다 끝날 거로 판단하고 무장을 해제한 상태였다. 순식간에 마지노선이 뚫렸다. 곳곳에서 육탄전이 벌어졌고 짱돌도 날았다. 둑을 넘은 물결은 을지로까지 흘렀다.

결국, 중앙파가 책임을 떠안고 감옥에 가다

과정에서 나는 연행됐다. 닭장차에는 쌍용자동차 정주용 등이 있었다. 나는 금속 담당 정보경찰 임○○에게 전화를 걸어 검·경 대응수위가 어떨지 물었다. 다친 경찰들이 있어 폭력을 쓴 몇몇은 구속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내가 혼자 구속되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는 전부 풀려나게 하자고 제안했다. 어차피 연행된 상태고 상경투쟁 대오에 구속 부담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임○○은 폭력을 쓰지 않은 한석호가 왜 구속되려 하냐며 당황스러워했다. 마이크를 잡아도 폭력을 안 쓰면 감옥에 안 갈 수 있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나는 닭장차에서 금속 광주전남본부 권오산을 발견했다. 장기 수배에 가명을 쓰고 있었다. 반드시 살려야 했다. 나는 금속 사무차장 심상정(중앙파)과 문성현에게 연달아 전화했다. 무조건 나만 구속되고 나머지는 어떤 조사도 없이 풀려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더는 싸우지 않고 상경투쟁을 마무리한다는 협상카드를 던져 보라고도 했다. 휴가 보낸 셈치고 꼭 그렇게 하라고 우기다시피 요청했다. 문성현도 심상정도 확답하지 않은 채 논의해 보겠다고만 했다.

그러는 동안 닭장차가 경찰서에 도착했다. 연행자들을 각 책상 앞에 앉히고 조서를 꾸미려 했다. 나는 경찰들에게 욕을 하며 조사를 방해했고, 연행자들에게는 조사에 절대 응하지 마라고 소리쳤다. 경찰은 조서를 미뤘다. 다음날 오전이었다. 종각 싸움으로 상경투쟁의 사기가 높다는 전언이 들어왔다. 연행자(총 44명, 각 경찰서 분산) 중 한석호만 구속하고 나머지는 조서 없이 석방하는 것으로 금속과 경찰 사이에 협의가 됐다고 했다. 오후였다. 협의대로 검찰 지휘가 떨어졌다 했다. 다만 상경투쟁이 마무리된 뒤에 풀어 주는 것으로 했다고 했다. 밤이었다. 마침내 연행자 중 나만 남고 나머지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만 적고 나갔다. 권오산은 가명을 적고 나갔다. 유치장에 혼자 남은 나는 상경투쟁 준비하고 진행하느라 밀렸던 잠에 빠져들었다. 나중에 경찰은 권오산이 연행됐던 사실을 알고 잡으러 다녔지만, 다행히 수배 기한을 잘 넘겼다.

서울구치소에서 검취(검찰취조)를 나갔다. 검사가 호송 교도관에게 수갑과 포승을 풀라고 하더니 검사방으로 안내했다. 검사실에 검사의 방이 별도로 있었다. 검사는 커피와 담배를 내밀었고 임○○에게 전말을 들었다면서 의리가 대단하네요 했다. 재판 짧게 끝내고 집행유예로 나갈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얼마 뒤 손낙구와 신언직이 면회를 왔다. 신언직은 종각 마지노선을 처음으로 뚫었다면서 석호로라고 이름 붙였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손낙구는 ○○○(현장파, 거론된 사람 중 하나)이 한석호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쇼하고 있네, 라고 했다고 했다. 치가 떨렸고, 출소하면 사실을 있는 대로 쓰겠다고 맘먹었다. 그렇지만 관뒀다. 속상할 때면 주변에 간간이 얘기한 적이 있기는 했어도, 오늘까지 가슴에 눌러 뒀다.

검찰은 상경투쟁이 끝나자 종각 싸움을 이유로 금속연맹 문성현·이홍우·백순환·이석행·오종쇄·전재환 등 지도부 6명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석행은 국민파, 5명은 중앙파였다. 영장을 피해 명동성당 농성에 돌입한 금속연맹은 문성현만 구속되는 조건으로 자진 출두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서울구치소 면회 길에서 나는 문성현과 반갑게 만났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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