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병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지난해 6월 초로 기억한다. 여러 노동단체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정부에 요구하며 서울 도심 곳곳에서 집회를 열었다. 필자를 포함한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활동가들도 서울지하철 혜화역 근처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 주최측이 나눠 준, 하얀 바탕에 붉은 글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구호를 외쳤다. ILO 핵심협약은 80%에 가까운 ILO 회원국이 비준한 글로벌 상식이다. 그런데도 기업과 국회의 눈치를 보는 정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구호를 외치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우리는 집회를 마치고 서울광장으로 향했다. 20번째 생일을 맞은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서울지하철 시청역 계단을 올라가 지상에 나올 때쯤, 날카로운 확성기 소리가 귀를 때렸다. 퀴어축제에 반대하는 종교단체의 목소리였다. 경찰버스 여러 대가 차도 가에 주차돼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축제의 열기가 어렴풋이 다가왔다. 서울광장을 바로 볼 수는 없었다. 광장을 따라 둥글게 간이 벽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간의 충돌을 막기 위해 설치된 벽이다. 벽을 따라 잠시 걷자 출입구가 보였다. 우리는 축제 속으로 들어갔다.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복장이었다. 일상에서는 보기 힘든 다양한 스타일의 옷으로 멋을 낸 사람들이 보였다. 각종 장신구와 타투도 화려했다. 그리고 축제의 음악소리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넓은 광장이 무대처럼 느껴졌다. 다양한 복장과 신나는 음악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밝은 표정과 자연스러운 행동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들은 사회의 경직된 규범과 틀을 벗어던진 사람 같았다. 자유로웠다. 춤을 추며 뛰어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문득 춤을 추어도 부끄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속 주인공인 ‘그리스인 조르바’가 된 기분이었다.

퀴어축제를 1시간 정도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 하루를 되돌아봤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노동조합의 집회는 축제처럼 자유롭지 못한가?’

몇 가지 답이 떠올랐다. 먼저 복장. 집회에 나온 조합원들의 복장은 거의 동일하다. 붉은 머리띠에 어두운색 조끼 차림이다. 같은 복장을 입고 동일한 구호를 외치는 조합원들은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집회 현장에 가면 마치 군 훈련소에서 들었을 법한 음악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멜로디도 가사도 딱딱하다. 거부감이 들기 쉽다. 외양만 놓고 보자면 노동조합 집회는 축제보다는 군사훈련에 더 가깝다.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글·사진·영화 등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는 크게 내용과 형식으로 구성된다. 집회 역시 다를 바 없다. 아무리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요구한다 한들 그 형식이 대중과 괴리돼 있으면 공감을 얻어 내기 쉽지 않다. 형식이 딱딱해지면 내용도 자연스럽게 딱딱해지기 마련이다.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특히 젊은 세대의 눈으로 바라본 집회는 정말이지 낯설 것이다. 복장도, 음악도, 구호도. 마음을 터놓고 다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기에는 너무나도 먼 존재다. 마치 군 훈련소에 들어가자마자 큰 충격을 받은 나처럼 말이다.

노동조합이 조금 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화섬식품노조 네이버지회가 좋은 본보기다. 네이버지회는 노동조합의 경직된 이미지를 벗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존의 딱딱한 호칭·용어를 말랑말랑한 것들로 대체했다. 현수막·피켓·유인물 등도 대중친화적인 디자인으로 꾸몄다. 집회 현장에서 민중가요가 아닌 동요를 틀고 그에 맞춰 율동을 췄다. 파업시에는 다 같이 영화를 보는 것으로 집회를 대체하기도 했다. 타투할 자유와 권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도 유연한 투쟁 방식을 선보이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적극 소통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모았고, 타투전국순회전시회 같이 예술을 투쟁에 접목해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노동조합의 모든 집회가 축제처럼 자유로울 수는 없다. 또 그래서는 안 된다. 분명 절박하고 힘찬 투쟁도 필요하다. 여전히 많은 노동자가, 특히 대다수 비정규 노동자가 일터에서 고통받고 있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이들의 치열한 노동과 삶을 모두 축제로 승화시키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어진 낡고 딱딱한 복장과 음악, 호칭·용어 등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게 정답은 아니다. 그건 무능에 가깝다. 노조 조직률을 올리는 것이 노동조합의 지상과제 중 하나라면서 왜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가? 최신 음악을 듣고, 유튜브를 보며, 각종 SNS 즐기며 자란 젊은 세대에게 노동조합이 어떻게 비칠지 치열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ilecd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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