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졸자 중심의 공개채용 방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비정규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정부는 노동자의 근속기간과 경험을 토대로 자격을 인증해 주는 국가역량체계를 수년째 개발하고 있다. 지난 5월 비정규 노동자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비정규직 이제그만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이 주최한 기자회견 모습.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실제 일을 한 경력을 토대로 자격을 인정해 주거나 학위를 주는 제도는 영국과 호주 등 일부 국가에서 활성화했다. 일을 한 기간과 경험을 노동자의 역량으로 인정하는 제도나 문화가 있었다면 보안검색요원을 청원경찰로 채용하기로 한 인천국제공항공사의 공정성 논란도 다소 희석됐을 것이다.”

채창균 한국직업능력개발원 미래인재연구본부장의 지적이다. 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검색요원의 평균 근속기간은 7~9년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사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선언한 2017년 5월12일을 기준으로 해도 꼬박 3년을 넘겼지만, 여전히 사회 일각은 이들에게 ‘자격 없음’ 딱지를 붙이고 있다.

근속기간 10년 넘어도 공채 아니니 자격 없다?

공사만의 일은 아니다. 지난해 통계청의 근로형태별 부가조사에 따르면 국내 비정규 노동자 수는 약 748만1천명이다. 이들의 평균 근속기간은 2년5개월이다. 달리 말하면 이들은 2년 넘게 일하고도 여전히 해당 업무에 대한 전문성과 경험을 인정받지 못한 채 신규 입사한 정규직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상대적으로 객관적이고,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알려진 공개채용 방식을 통해 입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이를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국내 시중은행 한 곳에서 10년 넘게 일한 정아무개씨는 “채용형태와 실제 업무성과는 비례하지 않았다”며 “우수한 성적으로 바늘구멍 같은 채용경쟁을 뚫고 들어온 대졸 신입이 고졸 취업자보다 못한 경우도 많아 채용방식이 노동자의 역량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대졸자를 중심으로 한 공개채용 방식이 취약계층에게 불리하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인천국제공항 소방대 한 노동자는 “소방대나 보안검색요원 가운데 많은 노동자는 오랫동안 취업을 준비하기 어려워 일찌감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취업한 사람들”이라며 “수년간 정부가 강조하는 생명·보안 관련 핵심업무를 담당했는데 이런 경력을 도외시한 채 대졸자들과 다시 시험을 보라는 게 공정한 것이냐”고 토로했다. 여러 조사에 따르면 취업준비생의 취업준비 기간은 약 11개월(통계청 2018), 취업준비 비용은 월 29만7천원(취업포털 2019)이다. 합산하면 약 330만원 정도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저무는 대졸자 공개채용 방식
외국은 노동도 학위·자격에 포함


기업 입장에선 공개채용을 통해 선발한 신입사원과 실제 직무가 부합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많다. 최근 채용시장을 정시 공개채용에서 수시채용으로 전환하는 배경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필요한 직무에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뽑는데 공개채용 방식은 부적합하다”며 “기껏 채용해도 직무가 맞지 않는다며 퇴사하거나 사실상 노는 인력으로 전락한 경우도 많아 부담이 크다”고 전했다. 실제 한 취업포털에 따르면 상장사 530곳 가운데 공개채용 방식으로 신입사원을 선발하겠다는 비율은 39.6%에 불과했다. 41.4%는 수시채용으로 전환했다. 한 노조 관계자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공개채용 방식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도 있으나 최근 수년간 수시채용이 지속적으로 확대해 온 것은 코로나19와 무관한 뚜렷한 경향”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와 달리 공개채용 방식이 낯선 해외에서는 경력을 학위와 균등하게 바라보고, 취업 자격을 인정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전 세계 177개국이 국가역량체계를 구축했거나, 구축을 완료했다. 대표적인 게 호주 국가역량체계(AQF)다. 90년대부터 대학 졸업생이 직무역량 문제로 직업교육훈련을 다시 이수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마련했다. 대학 등 교육기관에서 받은 학위와 직업훈련기관에서 받은 교육을 연계해 하나의 자격틀로 통합한 제도다. 직업훈련기관에서 3~4년 교육을 받으면 대학에서 학사학위에 준하는 교육을 받은 것으로 인정해 준다. 눈에 띄는 점은 2002년 도입한 선행학습인정 제도다. 교육·훈련기관만이 아닌 실제 노동현장 경험과 근속기간도 자격틀에 포함했다. 1년간 노동을 한 뒤 1년간 직업훈련기관을 다니고, 다시 2년간 대학을 다니면 4년제 대학 학위를 수여받는 셈이다. 순서를 거꾸로 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영국은 각종 활동에 학점을 부여하는 EQF 제도를 운용한다. 난도와 시간에 따라 학점을 부여하고, 학점을 충분히 취득하면 학위를 준다. 학교를 벗어난 일터에서 이뤄지는 직무역량 등을 측정하고, 학습을 독려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다.

독일도 국가역량체계(DQR) 제도가 있다. 호주·영국과 마찬가지로 △학위와 직업자격 비교 △인력·교육 경로의 이동성 개선 △무형식·비형식 학습을 통한 역량의 공식화 △평생학습 촉진 등이 목적이다. 2006년 개발해 2013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학교를 다니지 않고 일·경험에서 얻은 역량인 무형식·비형식 학습 역량을 실제 취업이나 학위과정에 적용할 수 있도록 공식화한다.

“대졸자 중심 채용시장 대안 기대”

이런 제도는 노동자의 노동시장 유입 경로를 다양화하고 실제 직무에 적합한 역량을 노동자가 기를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게다가 노동시장 참여에 어려움이 큰 취약계층이 효과적으로 노동시장에 편입될 수 있도록 하는 기능도 기대할 수 있다.

김진실 한국산업인력공단 NCS기획부장은 “한국형 국가역량체계(KQF)를 구축하면 대졸자 중심의 취업시장에서 공개채용 준비에 어려움을 겪는 취약계층의 노동시장 진입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며 “채용방식의 완전한 대안이라고 강조하긴 어려우나 여러 채용방식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아 직무와 역량 중심의 채용을 확산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국가역량체계 구축을 위한 작업을 차곡차곡 진행하고 있다. 주무부처는 교육부와 고용노동부다. 교육부는 지난해 KQF를 고시했다. 노동부는 공단을 중심으로 산업별 역량체계(SQF)를 구축하고 있다. 산업별로 상이한 직무별 역량을 가늠하는 잣대로, 이를 완성해 KQF와 연동하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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