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국사편찬위원회

“민감하고 비상히 지적인 사나이인 데다가 대단한 미남자이기도 했다. 그 시기에는 공산주의파와의 투쟁이 첨예해지고 있었는데, 김충창은 공산주의측에 서 있었다. 이론적으로 튼튼한 기초를 갖고 있는 사람은 그 한 사람뿐이어서 이론투쟁에서는 그가 늘 이기고 있었다. 우리는 담화하는 가운데서 곧 종신토록 변함없는 우정이 싹트게 됐다.” “나를 공산주의자로 키워 준 사람은 김충창이다. 그는 조선 청년들의 생활이 가장 곤란한 시기(1922년부터 1925년까지)에 나의 이론적 수양을 지도해 준 사람이다. 김충창은 내가 알게 된 사람들 중에서도 나에게 제일 큰 감화를 주었다.”

항일혁명가 김산(장지락)의 일대기를 기록한 님 웨일스(Nym Wales)의 <아리랑(Song of Ariran)>에 나오는, 1924년 북경에서 김성숙(김충창)을 처음 만난 김산의 소감이다. 만 18세에 출가해 승려가 됐고 3·1 운동에 참여해 구속됐으며 북경에 유학, 중국 각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해방 후 환국해 이승만 독재정권과 5·16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면서 혁신세력 통합에 심혼을 바쳤던 김성숙의 이야기다.

용문사에서 출가, 3·1 운동 참여

김성숙(金星淑, 1898년 3월10일~1969년 4월12일)의 어릴 때 이름은 성암(星巖), 호는 운암이고 항일운동 과정에서 규광(奎光)·충창(忠昌)·창숙(昌淑)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아버지 김문환(金文煥), 어머니 임천 조씨(林川 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가지 못하고 부모의 밭일을 돕고 조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1908년 10세 때 마을 유지들이 세운 대한독립학교에 들어가 공부했다. 이 학교는 애국심을 높이고 목총을 주며 군사훈련까지 시켰는데 김성숙이 나팔수로 뽑혀 대열 앞에서 행진했다.

1910년 한일병탄 이후 국내 의병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수많은 애국자들이 만주·연해주 등지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했다. 이런 소식을 자주 전해 듣고 독립운동 투신을 결심한 김성숙은 평양을 거쳐 원산에서 배를 타고 천진으로, 다시 만주로 들어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할 계획을 세웠다. 그의 나이 만 18세, 1916년 어느 날 땅 판 돈 은전 300원을 부모 몰래 훔쳐 원산까지 갔으나 일본 헌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여기에서 탈출해 풍곡 신원(楓谷 信元) 선사를 만나고 그를 따라 용문사에 들어가 출가해 본사인 봉선사의 월초 스님에게 ‘성숙’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는 불경을 연구하면서도 현대철학과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했는데, 특히 헤겔의 변증법을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불교계 인사 김법린·한용운 등과도 교류한 덕에 3·1 운동에 참가했고 경기도 양주와 포천 일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지방 애국자들과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에 체포돼 감옥에 갇혔다. 1920년 출옥 이후 강연단을 꾸려 전국 각지를 돌며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국내 최초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조선무산자동맹과 조선노동공제회에 1922년 승려 신분으로 가입해 활동했다. 이때부터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많이 읽고 혁명의 원리를 깨우치며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북경 유학 ‘붉은 스님’

김성숙은 1923년 젊은 승려 5명과 중국 북경으로 갔다. 망명 초기 진보적인 잡지 <황야(荒野)>를 발행하고 주필을 맡아 반일사상을 선전하다가 승려복을 벗어던지고 북경 민국대학에 입학해 정치학·경제학을 공부하며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1924년 북경의 조선기독교청년 회의기간 학생회합에서 김산을 처음 만난 게 이즈음이다. 일본을 거쳐 중국으로 건너와 6개월간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를 배우고 상해 임시정부 <독립신문> 교정원 겸 인쇄공으로 일하며 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났던 김산에게는 아직 무정부주의·민족주의 성향이 남아 있었다. 이미 마르크스주의를 터득한 일곱 살 연상인 선배, 김성숙이 이런 김산을 공산주의자로 바꿔 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붉은 스님’으로 불린 김성숙은 1925년 김산·김원봉·양명·장건상·김용찬·김봉환·이낙구 등과 함께 북경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해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지부 형태로 ‘창일당(創一黨)’을 창립했다. 그해 겨울 김산과 손잡고 창일당 기관지, 조선어판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창간했다. 김성숙이 주필을 맡아 반년도 안 돼 고정독자 3천명을 확보했으며, 1926년까지 계속 발행돼 조선·만주·연해주·미국·유럽 각지의 조선인 학생들에게 우송됐다.

김성숙은 <혁명>에 우수한 논문을 많이 게재해 일제 침략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피압박 민족해방투쟁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이 당시 중국공산주의청년동맹 초대서기 서존통, 중국공산당 창시자의 한 사람인 이대소, 국제공산당 지도자의 한 사람인 소련의 보로딘 등 외국 공산주의 지도자들과도 친분을 가졌다. 또 그는 반일투쟁을 폭넓게 전개하기 위해 북경의 조선인 대학생을 한데 묶어 고려유학생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일했으며, 신채호의 추천으로 조선의열단에도 가입해 급진적인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26년 김성숙은 활동무대를 북경에서 광주로 옮겼다. 광동 지방은 중국의 1차 국내혁명전쟁 시기 가장 일찍 구축된 혁명근거지로서 동방의 약소민족 열혈청년들의 주목을 끌었다. 김산·김원봉·오성륜 등도 광주로 달려가 혁명의 회오리에 빨려들었다. 그들의 활동은 중산대학과 황포군관학교를 무대로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조선인 유학생 청년회 내부에 민족주의·무정부주의 성향의 의열단,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지부조직들의 주도권 쟁탈전이 심했다. 김성숙·김산·오성륜 김원봉 등이 ‘파벌 없는 군중운동’에 노력한 결과, 80여명으로 ‘K·K’라는 하나의 비밀조직을 만들고 의열단의 명칭을 조선민족독립당으로 바꿔 청년회와 함께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 사진 앞줄 왼쪽부터 이익성·엽홍덕·신악·이집중·한지성·주세민·박효삼·김성숙·석정·최창익·김원봉·이해명·권채옥·김위 선생. <국사편찬위원회>

중국 ‘광주코뮨’ 이끈 연대장

1927년 4월12일 장개석이 반혁명 쿠데타를 일으켰다. 조선인 혁명가 200여명이 투옥되는 등 시련이 닥쳤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광주 황포군관학교를 떠나 상해를 거쳐 무창의 중앙군사정치학교로 이동했다. 김성숙은 2방면군 군관교도퇀의 지하 공산당 소조 책임자였는데, 50여명의 조선인 혁명가들과 다시 광주 사포영으로 갔다. 위험한 환경에서 잠복해 있던 김산, 황포군관학교 특무영의 최용건(최석천) 등 공산당원, 중산대학의 조선인 학생들과 연계를 맺었다. 이때가 광주봉기 직전이었다. 총 지휘부로부터 최용건과 함께 연대장으로 임명받고 광주봉기에서 목숨 걸고 용감하게 싸웠다. 봉기 실패 이후에는 중산대학 1기 여대생, 아내 두군혜와 광주 시내에 숨어 지내며 조선인 혁명가들의 안전과 철수를 도왔다.

1928년부터 1934년까지 김성숙은 상해에서 주로 저술 활동을 하면서 반일단체들의 선언을 기초하고 반일통일전선을 위한 이론적 뒷받침에 몰두했다. 1932년 상해가 일제에 함락되자 광서사범대학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다. 1936년 박건웅 등 진보적 독립운동자들을 규합해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고 <민족해방>를 발행해 전 민족의 반일투쟁과 혁명단체들의 통합을 주창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유자명의 조선혁명자연맹,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등을 연합해 그해 11월2일 무창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 상임이사와 선전부장으로 활동하고 잡지 <민족전선>을 발행했다.

중국의 2차 국공합작 분위기 속에서 김성숙은 1938년 10월10일 김원봉과 함께 중국 본토의 조선인부대로서 ‘조선의용대’ 창립대회를 개최하고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겸임했다. 이 자리에는 중국공산당 대표로 주은래가 참석해 ‘항일전쟁과 동방피압박인민의 해방’이란 연설을 통해 여러 나라 인민들의 단결과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역설하고 조선의용대 용사들의 반일 애국 독립의 의지와 승리의 신심을 지지·격려하기도 했다.

조선의용대는 1940년 11월 북상을 결정하고 1941년 3월 낙양에서 태항산으로 이동해 같은해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이듬해 7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됐다. 이 과정에 의용대 안에서 김원봉의 라이벌이었던 최창익이 무정·김두봉·한빈 등을 내세워 조선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조선의용대가 그간의 장개석 휘하 남의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화북으로 가지 않고 남은 의용대는 광복군 1지대로 편입되고 김원봉은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하게 됨으로써 조선의용대가 분열하는 역사적 상처를 남겼다.

한평생, 독립과 통일을 위해

김성숙이 이끈 조선민족해방동맹도 조선민족전선연맹 해체와 임시정부 참여를 선포했다. 자신은 1942년 내무차관, 1944년 국무위원으로 활약했다. 그는 임시정부 안에서 친미사대주의 외교론자 이승만을 성토하고 좌우를 망라하는 폭넓은 임시정부 확대개편을 주장하기도 했다. 드디어 일제 패망의 날을 맞이한 김성숙은 1945년 12월 임정 요인 2진으로 환국해 잠시도 쉬지 않고 여운형과 인민당을 조직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으며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으로 일했다.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김원봉은 북으로 갔으나 김성숙은 남에 남아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뼈아프게 체험했다. 1951년 1·4 후퇴 때는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부역자’로 몰렸고 1957년 혁신세력의 통합을 추진했다가 보안법으로 6개월 옥고를 치렀다. 1960년 사회대중당, 1961년 통일사회당에 참여했는데 ‘반국가행위’로 또다시 10개월 징역을 살았다. 1965년 통일사회당 대표위원, 1966년 신한당 정무위원, 1968년 신민당 지도위원을 지내다가 1969년 지인들이 비나 피하라고 지어 준 초라한 ‘피우정(避雨亭)’에서 조선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파란만장한 혁명가의 생을 마감했다.

1928년 8월 김성숙과 결혼한 두군혜는 중국인 여성 항일혁명가이고 한중연합 항일투쟁의 모범이었으며 중국부녀자운동 이론 연구의 선구자다. 1981년 별세한 두군혜는 2016년 광복 71주년에 한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성숙과 두군혜 사이에 아들이 셋인데 첫째 김감은 전 광동성 교향악단 지휘자, 둘째 김건은 북경대 중앙미술학원 유화학부 부학장, 셋째 김련(김화)은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정보센터 고문을 지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