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직접 만든 영화가 있다. 한국도로공사의 톨게이트 비정규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투쟁 7개월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보라보라>다.

영화를 기획·연출한 김도준(33) 감독은 우연한 기회에 투쟁을 접하고 조합원에게 촬영을 제안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서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회사 전환 고용을 거부해 해고됐던 1천500여명의 요금 수납원은 다수가 중·장년 여성이거나 장애인·탈북민이다. 노조가 낯설던 이들은 “우리가 옳다”는 대표 구호를 외치며 투쟁에 확신을 갖게 된다. 영화에는 그렇게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모습만 나오지 않는다. 투쟁을 거치며 성장해 나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오롯이 담겼다.

김도준 감독의 부탁을 받아 민주연합노조 조합원인 김승화(44) 감독과 김미영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경북 김천에 있는 도로공사 본사 안 농성장과 서울 톨게이트 캐노피 위 곳곳을 촬영했다. 김도준 감독과 정길우 촬영감독도 광화문과 김천 농성장에서 싸우는 조합원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지난 여름 21회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관객들을 처음으로 만난 영화는 상영시간을 30분 늘려 1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개봉했다.

지난 19일 영화제 행사가 있었던 경기 고양시의 한 카페에서 <매일노동뉴스>가 김도준 감독과 김승화 감독, 그리고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반효정(45) 민주연합노조 조합원을 만났다. 김승화 감독은 현재 도로공사 부안지사, 반효정 조합원은 도로공사 상주지사에서 근무한다. 이들은 투쟁을 회고하며 “한번 더 투쟁하면 준비를 철저히, 그리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 투쟁하겠다”고 말했다. 투쟁을 거치며 스스로가 성장했다고 말하는 영화 속 주인공과 제작진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캐노피로 올려 보낸 카메라,
“놀이하는 것처럼 영화 찍었다”


- ‘한 달 만’에 만난 것을 오랜만에 만났다고 표현하던데. 
반효정 : (조합원들이) 뭉쳐있으면 좋겠다. 예전에 지부장님이 ‘이렇게 있을 때가 좋은 거야’라고 했는데, ‘뭐가 힘들까’ 생각했다. (조합원들이 전국 지사로 흩어져) 지금은 얼굴보고 소통하는 것도 힘들고, 모이는 것 자체도 힘들고. 그 말이 맞았다는 걸 이제 깨닫게 됐다.

김승화 : 지사마다 지형 특성이 다르다. 그러니까 같은 노조에 있지만 (투쟁) 내용이 다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함께 대응하기 어렵다.

- 영화를 기획하게 된 계기와 촬영을 제안받았을 때 소감은.
김도준 : 지난해 8월에 조국 집회가 있었다. 그 전에 대학에서 집회가 있었고, (광화문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일까 관심있어서 촬영을 갔다. 저녁에 조국 관련 집회가 예정돼 있었는데, 낮에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행진하는 걸 봤다. 뭔가에 끌려서 따라갔다. 조합원에게 조국 사태와 한국 사회 교육문제 관련해 물었는데 황당해 하시더라. (웃음) ‘해고돼서 길거리에 나와 있는데 이런 걸 물어 보나’라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후 유튜브에서 김천 본사를 점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갔다. 경찰에 막혀 촬영이 어려웠는데 문화제를 처음 보게 됐다. 충격을 받았다. 경찰이 언제 침탈할지 몰라 긴장 속에 있는데도 조합원들이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 신선했다. 맨살로 자본에 맞서는 것들이 느껴지더라.

이곳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취재하다 보니 서울 톨게이트 캐노피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촬영 방법을 고민하다가 드론을 띄우는 것은 기계적이고,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밥을 올리는 도르래에 카메라를 올려서 (촬영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김승화 : (캐노피 농성을 하는) 그때 캠코더가 좀 늦게 올라왔다. 좀 일찍 올라왔으면 다른 동생들이 했을 텐데. 언니들 6명이 내려가기 직전에 올라와서 남아 있는 사람이 찍다 보니 제가 찍게 됐다. 캠코더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학생 과제인 줄 알고 ‘재미있게 찍어 줘야겠다’ ‘우리 이런 데 있지만 즐겁게 있다’는 마음으로 찍었다.

김도준 : 상황이 열악하다고 들었는데 결과물을 받아보니 너무 대단했다. 강렬했다. 조합원들끼리의 관계와 현장이 드라마틱하게 담겨 있더라.

김승화 : 도준 감독님이 대면하며 카메라를 들이밀었으면 자연스럽지 않았을 거다. 서로 친한 동료가 ‘언니 얘기해 봐’ 라고 말하니까 가능했던 것 같다.

반효정 : 인터뷰 놀이하듯이 촬영을 시작했다. 영화가 된다는 사실은 (처음에는) 몰랐다. ‘무슨 카메라인데’ ‘몰라, 대학생들이 찍어 달래’ 이렇게 시작했다. 같이 생활하는 동지가 찍으니까 불편하지도 않고, 장난삼아 되더라. 다 찍은 건 감독님밖에 못 봤겠지만 들을 얘기, 안 들을 얘기 다 있을 수 있다. (속 얘기를 너무 많이 한 것 같아서) 그런 부분에 있어서 후회되는 부분도 있다.(일동 웃음)

캐노피 위 촬영을 맡은 김승화 감독은 농성장의 사람들을 비춘다. 톨게이트 수납원을 하기 전 조합원들의 인생이 어땠는지, 첫 투쟁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는다. 반 조합원은 ‘놀이같이’ 인터뷰를 하다 보니 캐노피 위의 조합원들끼리 더 잘 알게 됐다고 한다. 서로의 상황과 마음 속 이야기를 듣게 됐다고 한다. 캐노피에서 내려온 지금도 그들은 서로에게 돈독한 존재다.

 

▲ 김도준 감독. <정기훈 기자>

‘투쟁일기’처럼 써 내려간 영화
“구체적인 디렉팅하지 않았다”


- 각자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으면.
반효정 : 한 조합원이 (광화문에서) 경찰과 대치 후 잠깐 쉬는 시간에 숨 몰아쉬면서 ‘죽겠다’고 말하는 장면. 나는 왠지 모르게 그 장면이 처음 영화 볼 때부터 박혀 있더라. 다른 좋은 장면도 많고, 조합원이 노래를 크게 부르는 장면도 있고, 조합원이 항의하는 장면도 있는데, 왜 그럴까. 아마 내 나름대로는 그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캐노피에 있었고, 김천에서도 그렇게 심한 적은 없었는데, 광화문에 올라가 처음 (경찰을) 밀어 본 거였다.

김승화 : 우리를 대변하는 컷이기도 하다. 나이드신 분들이 젊은 경찰하고 대치하는 상황에서 ‘아휴, 힘들다’ 그러면서도 악을 쓰고 민다. 우리를 대변하는 모습이다. 나도 그 영상 보고 감동받았다.

한 조합원이 청와대에서 경찰들하고 대치하면서 ‘비켜라’라고 말하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 짤려서 5개월 동안 길바닥에서 이러고 있다. 그러니까 비켜라.’ 우리 현실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해고 뒤 7개월간 이어진 긴 투쟁이었지만 영화에는 웃으며 투쟁하는 조합원들의 모습도 자주 등장한다. 국회의원실을 점거한 조합원들이 태연하게 청소를 해 보좌진들이 당황하는 장면이나, 대중가요에 맞춰 율동을 하는 장면은 웃음이 절로 난다.

이들에게 투쟁은 일상이었기 때문에, 김도준 감독은 편집 과정에서 힘든 일과 즐거운 일을 모두 담고 싶었다고 한다. 영화 제목 ‘보라보라’는 김천 농성장의 율동패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투쟁을 그저 영화처럼 보여주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가 담겨 있다.

- 특별히 연출한 장면이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김도준 : 꼭 필요한 내용이 있으면 부탁드렸는데, 구체적인 디렉팅은 하지 않았다. 김승화 감독님이 알아서 찍으신 것이다.

김승화 : 김도준 감독님이 ‘일기 쓰듯 촬영해 달라’고 말했다. 10개를 찍으면 하나는 걸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찍었다.(웃음)

김도준 : 감독님이 직접 나레이션한 장면에 대한 이야기도 해 달라.

김승화 : 복자언니가 중요한 말을 한다. 도로공사 몇몇 직원들이 우리가 선전전을 하고 있으면 항상 서 있다. 한 직원이 복자언니에게 귓속말로 ‘시험보고 들어와’ 라고 했다더라. 복자언니가 ‘너는 게이트에서 돈 받을 수 있어?’ 이렇게 답했다는 거다. 그렇게 얘기하는데, 그 말이 딱 (마음에) 오더라. 내가 순간 부끄러워졌다. (투쟁을 다룬 기사) 댓글에 ‘정당하게 시험보라’는 내용이 많았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 보면, (복자언니에게 그렇게 말한) 사람들은 요금수납을 못하지 않을까. 그분들은 그 일을 못한다. 이분은 여기에서 수납원 일을 잘 할 수 있는 분인 거다.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할 수 있는 거다. ‘이 일은 중요하지 않고 저 일은 중요하다’가 아니라, ‘시험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거다. 복자언니가 중요한 말을 하는구나. 내가 깨우치지 못했던 것을 언니가 그 한 마디로 깨우쳐 줬다.
 

▲ 반효정 조합원.<정기훈 기자>

“갈등하고, 토론하면서 우리는 성장했다”

- 영화 속 조합원들에게서 힘이 느껴졌다.
김승화 : 몰랐던 걸 알아가게 됐다. ‘비정규직은 아예 없애 버려야겠다’고 바람이 거창해지더라. 그러면서 ‘모두가 정규직을 하면 돼’‘비정규직을 남용하지 못하게, 모두가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투쟁하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도준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했다. 우리도 영화를 찍으며 ‘우리의 투쟁을 미화시키거나 불쌍하게 찍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던 것 같다. 우리가 옳고, 당당하고, 정당한 것을 도로공사에 요구하는데 매달리거나 불쌍하게 보여 얻어 내는 듯한 모습으로는 비춰지고 싶지 않았다.

김도준 : 저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자가 나오는 다른 독립영화는 일종의 낮은 차원의 휴머니즘에 호소하기도 한다.

투쟁이나 현장 분위기도 항상 힘들지만은 않기 때문에, 조합원들의 희노애락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되 관객들을 일일이 설득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사람들이 살고,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 일상의 투쟁과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 편집 방향이었다. (설득하는 편집방향을 취했다면) 공동체가 지니고 있던 에너지와 빛, 힘이 영화에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2015년 이후 입사자들에 대한 노조 안의 갈등이나 토론 장면을 그대로 드러냈는데.
김도준 : 영화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맨 앞 부분은 투쟁 일상, 중간은 토론과 갈등, 마지막이 투쟁을 평가하고 기억을 공유하며 열망을 표출하는 부분이다. 나는 노조를 처음 보니까, 조합원들이 투쟁에 대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집행부와 의견 차이에 대해서 가감 없이 말하는 것이 충격이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모습에서 빛, 지성을 발견했다. 갈등도 나쁜 것이 아니라, 투쟁을 거치며 개개인의 의식이 성장하고 자연스럽게 갈등이 생겨난 것이다. 노동자 개인이 성장하며 조직도 성장해 간다. 또 옳은 방향은 있을 수 있었겠지만 지부장님이나 집행부가 가진 입장을 다 보여주고 싶었다.

김승화 : 우리가 처음에는 말도 잘 못했다. 그런데 (민주연합노조는) 우리끼리 토론을 잘 붙인다. 일기 쓰듯 그날의 투쟁을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성장하게 만들었다. 매일의 평가가 토론에 반영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말을 못했던 사람도, 한마디씩 하게 되고 자기 주장도 하게 되더라.

반효정 : 우리 지부장님과 부지부장님, 지도부가 조합원들이 의견을 낼 수 있게 방향을 잡아 줬다. 조합원들끼리 자유롭게 이야기하게끔 자리를 자꾸 마련했다. 처음에는 발언을 제일 싫어했는데 지금은 즉흥적으로 하래도 한다. 우리가 노조도 모르고 이랬는데, 교육을 거치며 노조가 생활의 일부분이 됐다.
 

▲ 김승화 감독.<정기훈 기자>

“투쟁하는 노동자는 빛난다”

- 김도준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조합원들이 오체투지하는 장면을 좋아한다고 했다.
김도준 : 이 영화가 나에게 주는 이미지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빛’이다. 그 장면에서 햇빛이 제일 아름다웠다. 그 장면은 노동자들이 청와대에서 막혀 돌아가는, 어찌 보면 패배로 볼 수 있는 장면인데 또 다른 투쟁이 시작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우리의 힘이 아직은 작지만 웃으면서 언젠가는 노동자가 뚫을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김승화 : 우리가 광화문으로 올라오며 이 투쟁을 끝내자는 마음으로 오체투지를 하고 마음을 다진 시간이었다. 김천 안에 대오를 남기고 올라오면서 ‘우리가 가서 끝낼게’ 같은 마음이 있었다.

김도준 : 힘든 와중에도 끝까지 왁자지껄하게 가는 뒷모습이 나는 너무 좋았다. 투쟁에서 본 아름다움이기도 하고.

반효정 : 오체투지하며 엎드려 있는데, 정말 많은 생각이 다 들더라. 아스팔트에 코를 박고 있으니 냄새도 나고. 아스팔트에서 오만가지 냄새가 난다는 걸 처음 알았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내가 처음 맡아 보는 냄새들이 났다. 잠깐 엎드려 있는 시간에 그동안의 투쟁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 왔던 것, 인생도 돌아보게 되고 투쟁하면서 있었던 일도 생각났다. 반성이나 성찰도, 조합원들 한 명 한 명 다 생각나고 그랬다. 그래서 난 오체투지가 참 좋았다.

- 이 영화는 각자에게 어떤 의미인가.
반효정 : 내가 살면서 이런 투쟁을 또 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투쟁을 했던 내 생활이 영화에 담기는 일은 더더욱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것 같다. 내가 죽을 때 살아 온 날을 회상한다면 내 인생에서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투쟁도 그렇고, 투쟁을 담은 영화도 그렇고.

김승화 : 투쟁을 다시 되짚어 볼 수 있는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게 정말 소중하다. 지금도 영화를 보면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가끔 꿈같고, 볼 때마다 새롭고 감사하다.

김도준 : 촬영하며 처음에는 나이가 많으셔서 조합원분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다들 정말 선생님 같다. 무척 많이 배웠다. 나의 세계도 엄청 확장됐고, 영화를 계속 만드는 데 힘을 얻을 것 같다. 이렇게 빛나는 사람들을 스크린에서 좀 더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고,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큰 기쁨이다.

 

<보라보라>는 21회 전주국제영화제·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21회 제주여성영화제에 초청됐다. 이후 대구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과 24회 서울인권영화제·7회 부천노동영화제에서 상영을 앞두고 있다.

다음달 10일에는 사단법인 노동희망이 주최하는 서울노동인권영화제에서 관객들을 만난다. 장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극장이고, 오후 2시30분에 상영(bitly.kr/UsF0mCrvQOE)한다. 영화가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도 준비돼 있다. 공동체 상영에 대한 문의는 김도준 감독(giantmiki@gmail.com)에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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