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이 노동자들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라는 노동계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부산고등법원 제1민사부(재판장 손지호 부장판사)는 13일 현대중공업 통상임금 소송 항소심에서 “노조가 통상임금에 포함해 달라고 요구한 정기상여금 700%와 설·추석 상여금 100%를 포함한 상여금 800% 전액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한다”고 판시한 1심 판결을 파기했다.

1심과 달라진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항소심 재판부는 현대중공업 정기상여금은 고정성·정기성·일률성을 갖춘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봤으나, 재직근로자에게만 지급된 설·추석 상여금은 고정성이 결여돼 통상임금에서 제외된다고 판단했다. 전체 상여금 800% 중 700%만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결론이다.

1·2심에서 더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은 신의칙 적용 여부다. 1심 재판부는 “노조가 소송을 낸 2012년 12월 당시 현대중공업의 경영상황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노조의 소송 제기가 신의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봤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최근 조선업종 불황에 따른 현대중공업 실적 악화를 이유로 노조의 소송 제기가 신의칙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정기상여금 700%가 통상임금에 포함되긴 하지만 회사가 이를 포함한 과거 임금소급분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통상임금 사건에서 신의칙을 어느 시점에 적용할 것인지, 즉 ‘소송 제기 시점’의 경영상태를 기준을 볼지, 아니면 ‘판결 시점’의 경영상태를 기준으로 삼을지가 쟁점이 돼 왔는데 1·2심 재판부의 판단기준이 완전히 엇갈렸다.

통상임금 사건에서 신의칙은 “회사가 어려우면 소급분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지급 예외조건이다. 노동자 입장에선 ‘고정성’이라는 까다로운 요건을 인정받아 통상임금 범위가 늘어나더라도, 법원이 “회사가 어렵다”고 판단해 버리면 소급분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현재와 같은 경기침체 상황에서 이번 사건 항소심 재판부처럼 ‘판결 시점’에 무게를 실을 경우 노동자들이 패소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신의칙 기준에 대해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나왔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대법원이 신의칙에 대한 보수적 잣대를 제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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