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나쁜 영화’보다 ‘착한 영화’가 더 위험하다. 여기서 나쁜 영화 혹은 좋은 영화라는 것은 엄밀한 미학 용어는 아니다. 이 칼럼에 한정해 잠시 쓸 뿐이다.

예컨대 <소수의견> 같은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뒷부분, 특히 재판 장면으로 가면 주인공인 변호사는 영화의 모든 요소(스토리·사건·캐릭터 등)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감동적’인 인물이 된다.

처음에는 주류 법체계에서 비껴나간 아웃사이더였다가 ‘우연히’ 재개발 철거 참사의 변호를 맡게 되고 결국 그 사건을 ‘영웅적’으로 해결한다는 이 영화의 뼈대는, 그러나 전형적인 할리우드 서부극이다. 거친 세파에 지쳐 버린 총잡이가 목이나 축이려고 ‘우연히’ 어느 마을에 들렀다가 그 마을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어서 다시 총을 꺼내 들고 ‘영웅적’으로 정의를 실현한다는 구성 말이다.

이럴 때 주인공 주변 모든 인물은 말 그대로 ‘주변화’된다. 영웅을 위한 보조 인물이 되는 것이다. 철거 참사 때 아들을 잃은 두 아버지, 철거민 사태에 연대하러 나선 활동가들, 음모를 밝혀내려는 여기자들이 모두 법정에서 영웅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변호사를 위해 주변으로 밀려난다.

철거반대 운동을 하는 활동가는 사건의 실체를 전혀 모른 채 ‘정의로운 말’만 하는 사람으로 주변화된다. 사건을 제대로 보도하려는 여기자 역시 ‘정의감’을 못 이기고 흥분할 뿐이다. 무엇보다 아들을 잃은 철거민 아버지는 짐승처럼 울부짖을 뿐 최소한의 조리 있는 말도 하지 못한다.

왜? 이 모든 것을 ‘영웅적’인 변호사가 다 하도록 연출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실제 현실의 울퉁불퉁하고 복잡한 양상은 ‘좋은 영화’에 의해 매끄럽게 다려져서 결국 복잡한 모순성과 현실의 생생한 인간의 모습들은 사라지고 만다.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영화 <굿모닝 베트남>도 그런 맥락에서 다시 보자. 라디오 DJ 크로나워는 베트남 전쟁터에서 미군 병사들을 위한 방송을 하게 된다. 전쟁터의 군사방송 기율을 중시하는 일부 간부들은 유머를 구사하는 그를 내켜 하지 않는다. 크로나워는 포연이 자욱한 사이공 전장의 끔찍한 상황에서도 일종의 블랙 유머로 전쟁의 비극성과 그 안에서도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 병사들,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의 희망을 방송으로 내보낸다. 그러는 중에 크로나워는 베트남 사람들을 위한 영어나 야구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

이렇게 순박하고 ‘착한’ 영화지만 바로 그 장면, 즉 미군이 영어를 가르쳐 주고 야구도 함께 즐기는 장면은 ‘착한 미군’의 순간적인 장면일 뿐이다. 이 영화에서 야구를 함께하는데, 야구를 처음 경험하는 베트남 사람들 모습이 ‘희화화’돼 그려진다. 멀쩡한 젊은 청년이 야구 배트를 휘두르다가 헛스윙을 하고는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넘어진다. 베트남 할머니는 공을 친 다음에 1루쪽으로 달리더니, 이럴 수가, 그냥 집으로 달려간다. 화면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미군 병사들과 마을 사람들이 쾌활하게 웃는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아무리 야구를 처음 접했다 해도 겉보기에 하얀 셔츠까지 말끔하게 차려입고 안경도 끼고 무엇보다 건장한 베트남 청년이 헛스윙을 했다고 해서 두세 바퀴 돌다가 펄썩 주저앉을 수 있는가. 아무리 야구가 공을 쳐서 ‘홈인’을 해야 점수를 얻는 경기라고 배웠어도 정말로 공을 친 다음에 집(홈)으로 달려가는 장면은 어떠한가.

물론 <굿모닝 베트남>은 잘 만든 영화고 또한 ‘좋은 영화’다. 그러나 맨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이렇게 ‘좋은 영화’에서 발견되는 위와 같은 어이없는 연출 장면, 즉 ‘순박한’ 베트남 사람들과 이들을 위해 영어도 가르치고 야구도 함께하는 ‘착한 미군 병사’라는 설정은 베트남 전쟁의 실체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짓밟히면서도 강렬한 독립정신과 그들 나름의 주권적인 문화를 간직해 온 베트남 사람들을 왜곡할 수 있는 것이다. ‘순박’하게 연출했지만 결국 ‘어리숙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스포츠가 때로는 그러한 ‘착한 의도’에 쓰이는 수가 많다. 그러나 의도가 착하다고 해서 결과가 반드시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던 미군 헬리콥터 부대는 그해 4월부터 아프가니스탄 동부 코스트주 어린이들에게 축구공을 ‘투하’하는 ‘축구 헬기 작전(Operation Soccer Chopper)’을 벌인 적 있다. 이 ‘훈훈한 작전’에는 한국계 미군도 참여했다. 헬기에 공을 싣고 비행하다가 아이들이 보이면 축구공을 떨어뜨려 주는 ‘작전’이었다. 그 당시 외신에 따르면 1천여개가 넘는 공을 투하했는데 처음에는 아이들이 미군 헬기라고 돌을 던졌지만 공을 얻기 위해서 점점 헬기쪽으로 다가오기도 했다고 한다.

이 축구공에는 여러 나라의 국기 문양이 인쇄돼 있었는데 그만 사우디아라비아 국기도 그려졌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 국기에는 무슬림의 신앙고백이 쓰여 있다. ‘알라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하마드는 알라의 예언자’라는 코란의 핵심 구절이다. 이를 무슬림들은 평생 실천해야 할 5대 의무 중 하나로 여겨 매일 암송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미군이 떨어뜨린 축구공을 현지 무슬림들이 코란의 성스러운 구절을 발로 차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당시 미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에서도 “기독교로 치면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발로 차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논평했다.

물론 이는 어찌 보면 작은 에피소드고 말하자면 실수다. 그렇다면 그런 구절이 없는 축구공을 투하하는 작전은 괜찮은 것인가. 글쎄, 어쩌면 ‘착한 의도’를 지닌 것인데 덮어놓고 비난할 수는 없지만, 코란 구절이 있든 없든 그 공은 ‘착한 미군’의 선물이 되는 것이다.

스포츠 선수들이 경기 외적인 상황에서 인도적인 활동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할 때 이런 정황들을 조금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선한 의도’로 하는 일이라 해도 상대방이 그것을 원치 않거나, 상대방을 그야말로 ‘원조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뭔가를 주면 좋아하면서 받을 것처럼 하는 것은 결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

5월13일 경기도 남양주체육문화센터에서는 ‘러시아 월드컵 본선 16강 기원’이라는 취지를 앞세운 ‘전국유소년축구대회’가 열렸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특별 이벤트가 열렸다. 국가대표 감독을 역임한 사람이 차고 역시 국가대표 골키퍼를 지낸 유명 스타가 막는 승부차기 이벤트. 이 이벤트를 통해 조성된 기부금 500만원은 북한 어린이들에게 축구용품을 기증하는 데 쓸 예정이라고 주관단체는 밝혔다.

조금 과하지 않은가. 홍보 이벤트 전문가가 기획하고 사회까지 본 이 행사에서 ‘북한 어린이’는 과연 누구인가. 최근의 변화된 남북한 정황이 어느 정도 반영된 이벤트로 보이는데, 과연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로 어떤 가치의 실현을 위해 축구용품을 북한 어린이에게 기증하는가.

왜 ‘좋은 일’하는데 참견이냐고 하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좋은 의도’라고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단체를 홍보하고 그날 대회를 널리 알리기 위해 혹시 ‘북한 어린이’가 대상화되고 주변화된 것은 아닌가. ‘좋은 일’을 할 때는 늘 이 점을 자문해야 한다.

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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