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가슴 먹먹하게 기쁜 날이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가 최근 내놓은 2차 조정 제안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는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과 삼성전자 양 당사자의 주장을 듣고 조정안을 제시하면 이를 수락 혹은 거부할지 결정하는 '조정' 방식이었으나, 이번에는 조정위원회가 양측 의견을 바탕으로 결론에 해당하는 중재 결정을 내리겠다는 게 핵심이었고 이를 삼성전자가 무조건 수용하기로 한 것이다. 중재대상은 새로운 질병 보상규정과 보상절차, 반올림 피해자 보상방안, 삼성전자측의 사과 권고안, 재발방지 및 사회공헌 방안으로 하고 있다.

이제야 겨우 또 한 걸음 나섰다. 황유미가 있었고 한혜경이 있었고 황상기와 김시녀, 반올림이 있었다. 이 땅 수많은 혜경이들의 어머니이자, 유미들의 아버지로 11년을 싸웠고 그 곁에 반올림이 있었다. 중재 합의 서명식에서 반올림 대표로 황상기 아버님은 말했다. “돈 없고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라 해서 작업현장에서 화학약품에 의해서 병들고 죽어 간 노동자를 10년이 넘도록 긴 시간 동안 해결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섭섭한 일입니다. 정부도 회사도 존재하는 이유를 안 물어보려야 안 물어볼 수가 없습니다”라고.

섭섭하기만 했을까. 11년을 싸웠다. 정부의 비호를 시멘트처럼 처바른 시커먼 바윗돌 같은 거대기업에 계란처럼 부딪치며 추위와 더위와 비바람 속 천막에서 1천22일을 싸웠다. 그동안 노동자들은 계속 쓰러지고 죽어 갔다. 반올림에는 320명의 직업병 의심 노동자가 접수됐고 118명이 사망했다. 반도체·전자산업만이 아니다. 곳곳에서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다치고 병들고 죽어 갔다.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을 다루는 이 칼럼 공간에는 애달픈 죽음의 이야기가 절반이다. 그런 노동자들의 죽음과 고통을 두고 정부는, 회사는 어디에 있었고 언론은 또 어떠했는지, 그가 정부와 회사의 존재 이유를 회의하며 담담하게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는 섭섭함을 넘어서는 통렬함이 담겨 있다.

가슴 먹먹하게 슬픈 날이다.

거대기업 삼성과 맞선 반올림의 끈질긴 성취와 진전 소식과 함께 마찬가지로 삼성에 당당히 맞섰던 진보정치인의 황망한 비보를 접했다. 선량함과 고결함만으로는 악랄함과 비열함을 이겨 낼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도 견디지 못해 생명을 던져 책임을 지고자 한, 한때 용접공이기도 했으며 노동운동가였고 진보적 정치인이었던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죽음 앞에서 다시 묻는다. 부끄러움을 아는, 책임질 줄 아는 기업과 정부는 어디에 있었던가?

그가 준비했으나 전하지 못한 마지막 메시지는 10년이 넘어서야 해결 실마리를 찾게 된 반올림과 함께 싸운 수많은 분들, 그리고 마찬가지로 기나긴 복직 투쟁 끝에 정규직 복직을 앞둔 KTX 승무원들을 향한 감사와 축하인사였다고 한다. 이제 노회찬 의원의 감사와 축하는 직접 들을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삼성의 사과와 반성은 직접 들어야만 한다. “완전한 문제 해결만이 발병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라 판단”하는 데 왜 이리도 긴 세월이 걸렸는지 알 도리는 없으나 그들이 깨달음을 얻었기를 바란다.

국정농단에 연루돼 재판을 받고 재벌가의 편법 승계라는 여론의 지탄이 한창인 상황에서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한 책략이라는 의심을 벗고 진정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영혼을 담은 진정어린 사과를 해야만 할 것이다. 삼성은 지금까지 직업병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과 가족들을 회유하고 이간하며 언론을 통해 국민들을 호도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고 사죄해야 한다. 아직까지 국가 핵심기술이며 영업비밀이라는 명분으로 감췄던 작업환경측정결과보고서를 공개하고 영업비밀 사전심사제를 적극 수용하는 것이 제대로 된 사죄 방식이며, 재발방지를 위해 필요한 기본 조치다. 정부도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 문제를 어느 편에 서서 바라볼 것인지, 어떻게 책임져 나갈 것인지, 존재 이유에 대해서 답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반올림의 끈질긴 성취에 대한 찬사와 더불어 노회찬 의원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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