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혁 공인노무사(한국노총 중앙법률원)는 지난해 옥시레킷벤키저 정리해고 사건을 맡으며 황당한 일을 겪었다. 회사가 한때 노동자 270여명에 달하던 익산공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며 내놓은 자료가 달랑 3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재무제표 2장과 손익계산서 1장이다.

이상혁 노무사는 19일 <매일노동뉴스>와 만나 “주식회사의 경우 감사보고서에 재무제표상 수치를 이해할 수 있는 산출내역이 주석으로 20~30장씩 붙는 데 반해 유한회사는 경영공시 의무가 없다 보니 매출과 손실의 근거를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이 노무사는 이어 “근거도 없는 수치만을 내놓고 회사가 어렵다며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곳이 바로 유한회사라는 외형 뒤에 숨은 다국적 기업”이라고 비판했다.

대다수 다국적 기업이 유한회사 형태로 국내에 법인을 두고 있다. 매출이나 영업이익에 대한 공시의무가 없다 보니, 조세회피 목적으로 매출을 해외 본사로 몰아줘도 알 길이 없다. 옥시레킷벤키저는 가습기 살균제 파동으로 불매운동이 일어난 2016년 1천억원의 손실을 입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납득할 만한 자료는 공개하지 않았다. 문형구 옥시레킷벤키저노조 위원장은 “2016년 5월까지 흑자였고, 불매운동 와중에도 제품이 팔렸다”며 “당시 영국 본사에서 수천억원의 피해자 보상금이 왔기 때문에 손실이 1천억원까지 날 수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스웨덴에 본사를 둔 자동차 부품업체 오토리브는 최근 인건비 부담과 수주실패를 이유로 원주공장에 대한 대규모 인력감축 계획을 발표했다. 고용불안에 놓인 노동자들은 회사가 내놓은 경영지표에서 고용안정을 요구할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영지표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노동자들의 설명이다.

엄태욱 오토리브노조 위원장은 “지난해 회사로부터 받은 경영자료와 최근 노동위원회에 회사가 제출한 자료가 달랐다”며 “노동위 자료에는 매출이익과 영업이익·당기순이익이 모두 줄어 있었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는 오토리브가 유한회사로 전환하기 직전인 2009년까지의 감사보고서만 공개돼 있다.

정부는 지난해 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외부감사법)을 개정해 유한회사의 외부감사 의무를 강화했다. 하지만 감사보고서 공시의무 조항이 포함되지 않아 반쪽짜리 개정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상혁 노무사는 “유한회사의 투명한 경영을 위해서는 감사보고서 공시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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