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의암 손병희 선생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잣대가 늘 공정한 것은 아니다. 실제보다 과대 포장되기도 하고 축소 왜곡되기도 한다. 손병희 선생에 대한 평가는 후자에 속한다. 필자는 일제의 계획적 조작과 광복 후 정치적 역관계의 결과이자 청산하지 못한 식민사학의 병폐 때문이라 생각한다. 손병희 선생은 전 민족적 궐기로 임시정부 수립을 이끈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명실상부한 주인공이다. 단지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동학 농민전쟁, 처절한 실패

손병희 선생은 1861년 충북 청원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적서 차별이 엄연했기에 불합리한 냉대를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다. 서자·아이·부녀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하늘이라는 시천주 사인여천(侍天主 事人如天)의 동학이 얼마나 매력적이었겠는가. 스물두 살 되던 해 조카 손천민의 안내로 동학에 입도했다. 동학도들의 생활과 실천에 큰 감동을 받은 손병희 선생은 수련과 포교에 정진했다. 그 결과 입교 2년, 1884년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을 대면하게 됐고 둘은 사제이자 동지로 동고동락했다.

1894년 조병갑의 학정에 항거한 고부 궐기 이후 2차 봉기 때는 최시형 선생으로부터 ‘통령’ 지위를 부여받고 북접 동학군 총지휘자로서 남접 지휘자 전봉준과 합세했다. 그러나 공주 우금티에 이르러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제·관군에게 무참히 깨지고 보은에서 군대를 해산하게 된다. 일제·관군을 피해 최시형 교주를 모시고 원주를 거쳐 원산에 다다랐는데, 조직재건 임무가 손병희 선생의 어깨에 얹혔다. 무조건 살아남아야 했다.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를 떠돌며 행상을 통해 생계를 해결하고 포교를 하며 도인들을 다시 묶었다.

집요한 추적을 피해 옮겨 다니면서 갈수록 기력이 쇠잔해진 해월은 손병희 선생에게 의암이라는 도호를 내리고 1897년 동학 3대 교주의 법통을 넘겼다. 그리고 이듬해 1898년 끝내 체포돼 교수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나 죽은 뒤 10년 안에 장안에 주문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리라”는 해월의 유언은 조선 백성이 원하는 개벽세상이 도래한다는 예언이자 그 현실화를 위해 준비하라는 명령이기도 했다. 동학 3대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은 국외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해월의 제자들은 속속 잡혀 갔고 자신을 동학으로 이끈 손천민도 체포돼 처형당했다. 손병희 선생은 왜놈·관군과의 전장에서 선진 문물의 압도적인 힘을 피눈물로 체험했다. 피신만 거듭하며 시간을 죽일 수는 없었다. 왜놈이 등에 업었던 서양을 배우려 한다는 우려를 물리치고 41세가 되던 1901년 이용구·손병흠과 함께 일본 밀항을 결행했다.

일본 밀항, 적이어도 배운다

일본에서 충청도 갑부 ‘이상헌’으로 철저히 위장하고 사람들을 두루 만났다. 정변으로 망명 중이거나 다른 이유로 머무는 이진호·권동진·오세창·박영효 등을 통해 신문물과 세계 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히면서 동학으로 이들을 인도했다. 손병희 선생은 미래세대인 청년에도 주목했다. 1901년 잠시 귀국, 황해도와 관서지방 포교를 독려해 3개월 만에 많은 이들이 입도하고 성금도 넉넉하게 마련했다. 1903년 이 성금으로 동학교도 자녀 24명을 일본에 유학하도록 했다. 1904년에는 40여명의 조선 청년을 유학시키고 장학금을 지급했다.

손병희 선생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동학 합법화를 구상했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 러일전쟁에서 일본 승리를 점치고 일본 지도층과 교류하며 거금 5만원(현재 약 75억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친일’에 대한 우려 섞인 눈길을 받기도 했으나, 반국가단체로 지목된 동학의 고립말살을 막기 위해 ‘진보회’로 개편하고 이용구를 대표로 세웠다. 진보회는 360여군에 20만명이 가입하는 등 놀라운 조직확장을 이뤘으나 ‘동학 아니냐’는 일제와 조정의 날 선 의혹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이용구는 신변에 위험을 느껴 일제의 앞잡이 송병준의 일진회와 통합을 추진했고, 일진회는 을사늑약에 찬성하는 등 친일행위를 노골화했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손병희 선생은 1905년 12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 소식을 듣고 교류하던 권동진·오세창·양한묵이 손병희 선생을 찾아 “이상헌 선생, 동학이 천도교가 됐다는데 그 교주가 누군지 아시나요?” “손병희입니다.” “그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이상헌이 아니라 손병희임을 알게 된 세 사람은 벌떡 일어나 큰절을 하고 동학에 입도했다.

손병희 선생은 국내 교단상황을 그대로 둘 수 없어 1906년 1월5일 급히 귀국했다. 부산항에 환영하는 신도가 3만명이나 나왔다고 한다. 귀국하자마자 이용구·송병준을 불러 일진회에서 손 뗄 것을 요구했고, 이들이 거절하자 오랜 동지 이용구를 출교했다. 그리고 기관지 <만세보〉를 통해 일진회와 천도교의 분리를 대대적으로 알렸다. 이용구는 기다렸다는 듯 시천교를 창시하고 친일행각을 공공연히 자행했다. 선생은 교단 정비에 착수했다. 대헌(헌법)을 제정하고 수도 조목을 정하는 한편 매 끼니때마다 일인당 쌀 한 숟가락을 정성껏 모아 교무금을 마련하는 성미제도를 확립해 3년 동안 천도교를 제 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박인호에게 자리를 넘긴 후 1908년 우이동에 은거했다.

겉으로는 당국에 통 큰 기부금을 내는 한량으로 보여 감시와 탄압을 따돌리고 안으로는 지방 순회강연, 교리강습, 지도자 육성 등 대대적인 교육사업에 나섰다. 한일병탄 전에 이미 천도교인들을 향해 “절대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습니다. 이제 몇 해 지나지 않아 그 능력을 보여 주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천도교, 대중적 독립운동의 길

우이동에 3만평의 땅을 조성해 봉황각을 짓고 별장이라 선전했지만 여기에서 1912년부터 연성수련회를 시작했다. 1기 21명, 2기부터 49명 단위로 참여시켜 482명을 배출했다. 1기생 21명 중 4명이 독립선언서 33인에 들었으니 봉황각이 독립운동가 양성소 역할을 한 셈이다. 또 보성전문학교와 동덕여전을 인수하고 20여개 학교에 정기적 재정지원을 했다. 천도교로의 개칭 과정을 거쳐 겉으로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해 종교를 보위하고 안으로는 자금과 교육공간을 마련해 독립의 내실을 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손병희 선생은 천도교 교리를 정리한 많은 저서를 남긴 사상가다. 흔히 동학 대표정신으로 생각하는 인내천도 손병희 선생이 처음 밝힌 것이다. 일본에 있던 시절 국내 동학교도들에게 병전(兵戰)보다 무서운 세 가지 ‘도전(道戰)·재전(財戰)·언전(言戰)’ 삼전론(三戰論)을 강조했다. 이념·경제·언론의 중요성을 늘 염두에 뒀던 것이다.

손병희 선생의 이러한 준비는 3·1 운동을 통해 그 진가를 확실히 보여 줬다. 1919년 동경 2·8 독립선언 소식을 접한 천도교 내부는 이미 독립운동을 대중화·일원화하고 그 방법은 비폭력으로 한다고 합의했다. 기독교는 단일한 천도교와 달리 논의가 복잡했는데, 이상재 장로는 독립청원이 적절하다며 참여를 거부했다. 평양의 이승훈은 동의했지만 자금 마련 어려움을 호소해 손병희 선생이 5천원(현재 7억5천만원)을 빌려줬다. 시일이 촉박하고 일경의 감시가 심해 불교계는 한용운과 백용성 두 사람으로 좁혀져 천도교 15인, 불교 2인, 기독교 16인이 합쳐진 33인의 참여가 이뤄졌다. 독립선언서도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인쇄됐다. 헌병통치 아래에서 독립선언서 제작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으나 매달 적자를 감내하며 인쇄소를 운영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독립선언서, 그리고 그날

그런데 인쇄기가 쉼 없이 돌아가는 깊은 밤, 종로경찰서 고등계형사 신승희(다른 이름 신철)가 들이닥쳤다. 인쇄소 사장 이종일이 새파랗게 질려 “손병희 선생께 가서 얘기하자”고 했고, 신승희는 “다녀오라”고 허락했다. 헐레벌떡 달려온 이종일에게 손병희 선생은 5천원(현재 7억5천만원)을 내밀었고, 신승희는 돈다발을 건네받고 조용히 인쇄소를 나갔다. 신승희는 3·1 운동 사후인 5월께 발각돼 헌병대에 붙잡혀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천도교 교인 300만명, 불교 교인 30만명, 기독교 교인 11만명이라니까 3·1 운동의 주요 토대가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천도교 교당을 덮쳐 압수해 간 돈이 130만원(현재 약 2천억원)이었다.


이처럼 3·1 운동은 천도교의 손병희 선생이 주도해 기독교·불교계가 하나 돼 온 겨레를 불러일으킨 거족적 만세시위였다. 손병희 선생은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체포·고문·투옥 중에 뇌일혈로 두 번이나 쓰러졌고 형 집행정지로 출옥해 곧 타계했다. 

▲ 양재덕 ㈔전국실업극복단체연대 이사장



올해 3·1 운동 100년을 맞아 종교지도자·사상가·독립운동가로서 민족자주와 만민평등 사상을 정치적 힘의 관계에 기초한 현실적 방법으로 용의주도하고 통 크게 벌이다가 순국한 의암 손병희 선생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