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나도 죽일 놈

▲ 조건준 <노멀 레볼루션> 저자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학살, 나치의 학살, 스탈린의 학살, 우익에 의한 좌익학살, 좌익에 의한 우익학살, 6·25 남북전쟁이 보여 준 동족학살, 두 번의 세계대전이 보여 준 인류의 인류를 향한 학살은 신의 말씀인 종교나 역사적 합법칙이라 여긴 사상 등 초인간적 이유로 저지른 살육이었다.

적대관계는 상대 생명을 완전히 끊어서 사라지게 하는 ‘절멸’ 없이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가 사회 집단인 경우 결코 쉽게 절멸시킬 수 없다. 노동자와 자본가,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백인과 흑인은 결코 절멸되지 않는다. 때문에 결코 평화는 없다. 이러니 경쟁하는 너와 내겐 결코 평화가 없고 인생은 적대적 전투다. 쉬면 죽는다.

절멸당하지 않고 절멸하기 위해 태어나면서부터 훈련을 받아야 한다. 조기교육에서부터 입시경쟁으로 취업전쟁으로 실적경쟁으로 끝없이 경쟁, 또 경쟁해야 한다.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하기 위해 미리 전투훈련을 받고 늘 전투태세를 갖춰야 한다.

존엄 같은 소리

존엄 같은 헛소리는 버려라.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에 얽혀 오직 경쟁하다가 죽거나 다치거나 승리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세계관에 평화란 없다. 인권은 없다. 절멸시켜야 할 그들을 어떻게 존중할 수 있는가. 그들이 절멸시키려는 내가 어떻게 존중받을 수 있겠는가. 존엄은 없다.

우린 집회에 가면 “노동자 자본가 사이에 결코 평화란 없다”며 노래한다. 노동자는 죽을 때까지 자본가를 절멸시키는 전투를 멈출 수 없다. 이런 위험한 노동자계급을 자본가가 곱게 볼까. 자본가는 쉼 없이 노동자계급을 절멸시켜 인적자원이자 생산수단인 사물로 만들거나 충성스런 종업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산 자와 죽은 자로 적대하고 전쟁 같은 진압작전이 펼쳐진 구조조정 현장에서 유사 만행을 겪으며 도대체 인간은 경험을 통해 학습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동족을 그렇게 죽여 놓고도 성찰하지 못하고 절멸을 선동하는 정치를 보면 인간은 역사를 통해 성찰할 수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자기가 세운 것으로 착각하는 재벌기업 창업주는 감히 직원이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덤비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창업주는 유언처럼 무노조 전략을 물려준다. 이런 직장엔 헌법도 노동권도 존엄도 없다. 아버지도 손자도 대를 이어 노조와해를 위한 전쟁을 한다. 인간답게 살아보고 싶은 노동자는 강한 벽에 부딪치자 목숨을 바쳐 열사가 된다. 정적을 향한 절멸 정치는 오늘도 뉴스에 반복해서 등장하고 끝없이 우리를 좌우로, 보수와 진보로 구분한다. 권력과 정치는 본래 그렇다는 철학과 이론으로 정당화하는 인간 상상력이 참 놀랍다.

합법칙성 앞에 아무것도 아닌 인간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 인간은 경제적 동물, 인간은 정치적 동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모든 주장은 틀렸다. “인간은 동족과 적대적으로 투쟁하는 동물”이다. 투쟁이 격하면 전쟁이다. 덜하면 경쟁이다. 전쟁 결과는 학살이다. 경쟁 결과는 인간을 서열화하고 물건처럼 쓰다 버리는 것이다.

히틀러는 생물학적 법칙, 공산주의자들은 역사의 합법칙성이라는 과학적 사회주의, 시장전체주의자들은 경제법칙을 신봉했다. “초인간적인 합법칙성에 법을 예속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과학주의적 믿음은 종교적 믿음과 유사하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어떻게 빠르게 시장전체주의로 바뀔 수 있었을까. “그들은 여전히 합법칙성의 개념을 변함없이 유지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시장독재로 대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독재권력에 맞서던 진보적 586운동권이 어떻게 보수적 시장권력에 복무하게 됐는지를 이해하는 열쇠도 여기에 있다.

아기 부처 말에 ‘백퍼’ 공감

우리는 합법칙성 아래서 경쟁 아니면 전쟁하는 전투기계인가? 아니다. 1944년 미국 필라델피아에 모인 사람들은 인류가 저지른 피비린내 나는 만행을 뼈저리게 성찰하며 선언했다.

국제노동기구(ILO) 헌장, 유엔 헌장 전문, 세계인권선언 속엔 필라델피아 정신이 스며 있다. 필라델피아 정신은 미국 독립선언이나 프랑스 인권선언과 달리 신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나치즘이나 공산주의와 달리 과학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야만적 인류행위를 피 흘리며 겪은 성찰을 통해 얻은 이성과 믿음으로 인간이 인간의 존엄을 천명한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야만이 지배하며 어제의 직장동료를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해 대던 정리해고 현장에서, 노조를 죽이려 달려드는 사용자와 계급적대를 부추기는 현장에서, 자결로 야만을 폭로한 노동자 장례식장에서 ‘인간 존엄성’이 얼마나 간절하고 소중한가를 깨달았다.

부처는 태어나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단다. 종교엔 신격화를 위한 뻥이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하늘 위에도 하늘 아래도 오직 내가 귀한 존재라는 아기 부처 말에 공감한다. 사람은 광대한 우주에서 티끌 같은 존재일지라도 누구도 대체 불가능한 유일하고 소중한 존재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노래하면서도 증오를 부추기는 기독교도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사랑받아야 한다.

종교나 과학이 아니라 경험하며 깨우친 온몸으로 말하고 싶다.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스스로의 노동을 가치 있게 여기는 자존감 위에 설 때, 서로 노동에 감사할 때, 비로소 적대와 절멸에 허덕이는 지옥을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읽은 필라델피아 정신이다.

권리 맛을 알까

ILO 기본협약 비준을 요구하는 집회에 참여한 조합원도 뭔 소린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시민들은 얼마나 알까. 사회변혁부터 앞세운 운동은 인권과 권리에 대한 기본에 충실하지 않다. 노조운동은 보편적 권리를 위한 운동이 아니라 색깔의 늪에서 헤맨다. 병든 몸에 걸친 옷이 빨갛니 파랗니 공격당한다.

“노동법의 위대한 특수성과 확고한 현대성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개인의 능력은 필연적으로 그가 소속돼 있는 집단의 능력에 달려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 있다. 네가 이 회사에 계속 남을 수 있거나 다른 데 취직할 수 있는 능력은 네 책임이 아니라 사용자 책임도 있다는 얘기다. 한국 현실에서는 개 풀 뜯어먹는 소리겠다.

노동 3권이라도 제대로 생각한다면 소원이 없겠다. “파업은 강자의 무기가 돼 가는 경향이 있다. 약자는 사실상 파업권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절박하게 여기면 좋겠다. 민주노총 총파업보다 산업피라미드 저 밑으로 밀려난 노동시민이 파업 근처라도 갈 수 있어야 한다. 좁은 상태에서 총파업을 외쳐 봐야 부메랑일 뿐이다. 우리가 연대할 때, 하청 뒤로 숨고 플랫폼 노동 뒤로 숨은 그들에게 연대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적당함이라는 꽃은 흔들리며 핀다

<필라델피아 정신> 저자는 국가권력을 지배계급의 도구로 보는 좌익적 시각과 국가를 시장을 위한 도구로 보는 시장전체주의자의 공통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회사를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사용자는 기업을 독재 영토로 만든다. 그곳엔 노동권도 인권도 없다.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 멈춘다. 좌익 계급주의자도 기업을 탈취해 국유화해야 할 물건으로 여긴다. 국가도 기업도 존중해야 할 인간관계이자 공동체가 아닌 이익과 지배를 위한 도구로 여긴다. 그러나…. “인간과 사물의 관계는 언제나 인간 사이의 관계가 드리우는 그림자였다.”

합법칙성을 앞세운 권력종자의 권력욕, 초인간적 경제법칙을 앞세운 이익종자의 탐욕을 넘어 어떻게 적당함을 찾을 수 있을까. 함께 노동현장에서 활동해 온 동료는 적당함에 대해 일깨웠다. 역동적 균형이 적당함이다. 함께 실천해 온 그도 나도 흔들리고 있지만, 아니 나만 흔들리는 중인지 모르지만, 적당함은 대충 중간에 기회주의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 적당함 또한 흔들리면서 인간 존엄을 향해 피어난다.

결핍에 내몰린 열등감으로 적개심에 전 지질함을 넘어 자존감을 품고 인간존엄을 무시하는 자들을 넘어설 때, 한편으로 계급적대를 부추기는 시장전체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존엄을 개무시하고 사람을 계급투쟁 도구로 여기는 편견을 넘어 연대할 때, 적당한 삶과 적정사회가 열린다.

<필라델피아 정신>을 읽으며 길을 확인한다. 탐욕과 궁핍, 지배와 굴종, 우월과 열등, 삭제와 혐오를 넘는 적정인생은 바로 필라델피아 정신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짧은 200페이지에 어려운 개념들이 등장하지만 당신에게 추천한다. “필라델피아 정신에 헬조선 탈출 비상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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