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학태 기자

국제노동기구(ILO)가 지난 21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총회에서 ‘일의 미래를 위한 ILO 100주년 선언, 2019’를 채택했다. ILO는 같은날 ‘일의 세계에서의 폭력과 괴롭힘 근절’ 협약·권고를 채택하면서 190번째 협약이자 206번째 권고를 내놓았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2일부터 15일까지 ILO 108차 총회 현장에서 100주년 선언문과 새로운 협약·권고가 나온 과정을 취재했다. 현장취재 기간 이후 진행된 상황은 현장에 남은 양대 노총·한국노동연구원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아 기사에 반영했다.

이달 15일 오전 스위스 제네바 유엔 유럽본부 회의실. ILO 총회 전원위원회 노동자그룹 회의가 시작됐다. 카텔레네 파스키에 의장이 11일부터 진행된 ILO 100주년 선언문 심사 상황을 전달했다. 선언문 초안에 대한 수정안이 너무 많아 논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파스키에 의장 입에서 의외의 단어가 나왔다. “Korea”였다. 그는 “한국 정부와 인도 정부가 선언문 초안에서 기본노동권을 삭제하자는 수정안을 냈는데, 철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 노동자그룹에는 굿뉴스(good news)”라고 했다.

회의장에 있던 한국노총·민주노총 관계자들이 파스키에 의장의 말을 듣고 눈을 치켜떴다. 사전에 파악하지 못한 눈치였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만지는 그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사태 파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산업안전보건은 1998년 채택한 ‘일터에서의 기본 원칙과 권리에 관한 선언문’에 명시된 권리에 추가되는 일터에서의 기본원칙이며 권리다.”

한국 정부가 수정안을 통해 삭제하려고 했던 내용이다. 어떤 이유로 삭제하자고 했는지, 왜 철회하기로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ILO는 100주년 선언문을 준비하면서 산업안전보건을 기본노동권에 포함시키려고 했다. 기존 8개 기본협약에 산업안전보건을 추가하자는 얘기다. 노동계는 찬성하고 사용자측은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정부그룹은 적극적인 쪽과 소극적인 쪽으로 나뉘었다.

한국 정부는 후자에 속했던 것일까 아니면 고용노동부 해명처럼 “단순한 실무착오”였을까. 결론적으로 초안은 수정됐다. 한국 정부가 의도했거나, 다른 국가가 밀어붙였거나.

ILO는 누구의 편? 

ILO는 노사정 3자 기구다. 한데 한국의 재계와 보수단체는 마치 노동자기구처럼 생각한다. 정부가 ILO 기본협약 비준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강성노조 힘이 세진다”거나 “전교조 합법화를 위한 것”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노동계는 “ILO는 우리 편”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하지만 스위스 제네바에서 지켜본 ILO 총회는 노사정이 치열하게 논쟁하고 힘겨루기를 하는 공간이었다. 노동자그룹과 사용자그룹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각국 정부는 현안마다 노사 어느 한쪽을 편들거나 중재한다. 힘든 과정을 거쳐 종국에는 노동자·사용자·정부그룹이 합의안을 도출한다. 100주년 선언문과 190번째 협약이자 206번째 권고인 ‘일의 세계에서의 폭력과 괴롭힘 근절’ 협약·권고를 채택한 이번 100주년 총회는 특히 그랬다.

정의규정부터 충돌한 190번째 협약

일의 세계에서의 폭력과 괴롭힘 근절 협약·권고를 심사한 기준설정위원회에서 뜨거운 논쟁이 전개됐다. 12일 오전 유엔 유럽본부 회의실에 많은 인원이 몰렸다.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다. 주최측은 위원 자격이 있는 노사정 대표단만 회의장 출입을 허용했다. 위원이 아닌 일반 비표를 단 기자를 스태프가 막아섰다. 통역 헤드폰도 없이 위층 갤러리로 올라가야 했다.

각국 노사정은 이날 회의에서 일터 괴롭힘과 폭력 정의를 놓고 초반부터 격렬하게 대립했다. 러시아 정부와 인도 정부는 '성적인 괴롭힘'과 '폭력'을 정의규정에서 삭제하자고 주장했다. 러시아 정부가 강한 목소리를 내면서 회의장 분위기가 싸늘해지기도 했다. 설득력이 없는 두 정부의 목소리는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이내 묻혀 버렸다.

최대 쟁점은 각 나라별 수준(national level)에 맞게 정의를 할지, 아니면 최소한의 국제기준을 만들 것인지였다. 12일과 13일 이틀에 걸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기준설정위는 협약 초반에 폭력과 괴롭힘을 정의해 국제기준을 마련한 다음 이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나라별 정의를 내릴 수 있도록 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지하림 변호사(한국노총 중앙법률원)는 “서로 다른 의견이 부딪히면서 진통을 겪었지만 노동자 권리를 좀 더 보호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리가 됐다”며 “노사정 어느 그룹도 협약과 권고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 김학태 기자

상대방 의도 역이용, 꼼수도 등장

ILO 총회에서는 상대방 의도를 역이용하는 ‘작전’도 등장했다. 기준설정위에서는 괴롭힘과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성소수자 취약계층 목록을 구체적으로 표시할 것인지 여부도 논쟁거리였다.

초안은 취약계층을 게이·레즈비언·양성애자·성전환자로 자세히 나열했다. 이와 관련해 "보호대상을 자세히 규정하지 말고 포괄적으로 제시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런데 사용자그룹이 느닷없이 초안 유지를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보호대상을 구체적으로 표기하면 사용자나 정부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사용자그룹은 논쟁을 하면서 대변인을 두 번이나 바꿀 정도로 적극적으로 입장을 개진했다.

노동자그룹은 사용자그룹의 '숨은 의도'를 직시했다. 각국 정부에 부담이 되는 협약을 채택해 협약 비준율을 떨어뜨리는 전략이라는 얘기다.

기준설정위 위원인 박주영 공인노무사(민주노총 법률원)는 “취약계층 목록 중 사용자그룹이 가장 강조한 것이 성소수자였다”며 “각국 정부가 비준하기 어렵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회원국이 ILO 협약을 잘 이행하는지 점검하는 기준적용위에서 한국 사례가 빠진 것도 사용자그룹의 의도가 먹힌 경우다. 당초 기준적용위는 이번 총회에서 한국 정부의 ‘고용 및 직업상 차별대우 협약’(111호) 위반사례를 안건에 올릴 것으로 예상됐다. 교사와 공무원의 정치적 활동을 금지한 국내법이 쟁점이었다. 그러나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았다.

기준적용위는 지역과 협약의 중요도를 감안해 안건을 안배한다. 보통 아시아·태평양지역 국가사례는 6건이 상정된다. 이라크·예멘·인도·필리핀·피지·라오스의 협약 위반사례가 기준적용위에 올랐다.

인도는 300인 미만 사업장에 근로감독을 하지 않기로 한 조치로 근로감독 협약(81호)을 위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필리핀과 피지는 노조간부 총살·압수수색으로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협약(87호)을 위반했다는 의혹에 휩싸여 있다. 나머지 3개 국가는 가혹한 형태의 아동노동 철폐 협약(182호) 위반 사례다. 우리나라 사례는 라오스 사례에 밀린 것으로 전해졌다.

182호 협약 위반사례가 세 건이나 되는데도 111호 협약 위반사례가 안건에서 빠져 버렸다. 재미있는 것은 라오스 사례가 사용자그룹 요구로 기준적용위 안건에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182호 협약은 18세 미만 아동에게 밀매·무력분쟁·매춘 같은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을 금지한다. 강제노동은 선진국보다는 개발도상국에서 주로 일어난다. 반면 111호 협약은 선진국도 위반하기 쉽다. 여기에 열쇠가 있다. 류미경 민주노총 국제국장은 “111호 협약처럼 선진국도 위반하기 쉬운 의제를 기준적용위 안건에 올려 권고안이 나오면 국제노동기준이 선진국 수준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다”며 “사용자그룹이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아동노동 문제 같은 후진국 의제를 들이미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산고 끝에 나온 ‘100주년 선언’
“국제노동기준 지키는 게 중요”


ILO 100주년을 맞은 이번 총회의 꼭짓점은 100주년 선언이다. 1944년 ‘국제노동기구의 목적에 관한 필라델피아 선언’에 버금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98년 일터에서의 기본원칙과 권리에 대한 선언에서 세운 네 가지 원칙은 8개 기본협약이 됐다. 100주년 선언도 비슷한 절차를 밟을 것으로 점쳐졌다. 노동자그룹과 사용자그룹이 총회 시작 전부터 ‘결전’을 벼른 이유다.

13일 오후 선언문을 축조심사하는 전원위원회 회의장. 의장석을 바라보고 왼쪽에 노동자그룹, 중간에 정부그룹, 오른쪽에 사용자그룹이 앉았다. 마이크를 잡는 이들이 세 방향에서 골고루 나왔다. 대부분 조곤조곤 말했다. 큰소리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마이크에 대고 말하면 번역된 말이 헤드폰에 들리기 때문이다. 내용은 치열했다. 목표와 일반원칙 같은 선언문 초반을 다루는데도 의견이 쏟아졌다. 한국 정부 자문역으로 회의장에 앉아 있던 남궁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열띠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원위 심사가 더디게 진행됐다. 그러자 전원위는 수정안을 주고받는 초안그룹으로 논의를 이관했다. 초안그룹에서는 선언 취지를 충분히 반영하려는 노동자그룹과 유럽국가 정부, 조문을 명확히 해서 확대해석을 방지하려는 사용자그룹·일부 중남미 국가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초안그룹 논의가 길어졌다. 20일에야 재개한 전원위는 선언문을 의결했다. ILO는 21일 오후 총회에서 ‘일의 미래를 위한 ILO 100주년 선언’을 채택했다.

한국 노동부가 삭제를 요청했던 문구는 바뀌어 있었다. “산업안전보건은 일터에서의 기본원칙이며 권리”라는 내용이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조건은 양질의 일자리를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됐다.

ILO 총회 기간 중 적지 않은 국내 전문가들이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고 밝힌 필라델피아 선언과 비교해 확정적이거나 대체할 만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필라델피아 선언에 필적할지, 그보다 못할지는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확실한 것은 세계 노사정이 합의를 거쳐 100주년 선언을 채택했고, 그것이 새로운 국제노동기준이 된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한국 노동상황은 언제나 국제노동기준을 밑돌았다는 점이다. 전원위 위원으로 활동한 김근주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선언문이 약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도 없고 거창하게 나왔다고 해서 선언에만 의지할 수도 없다”며 “이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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